모든 대면 대체할 수 없고 결함도 있어
장밋빛 허황만 부풀리는 자 경계해야

코로나19에 잠식당한 개인의 일상을 표상하는 것은 공간의 달라짐이다. 도서관을 드나들 수 없게 되자 내가 주로 서식하는 곳은 커피 파는 가게가 되었다. 감염병의 확산은 나처럼 '집콕' 생활을 죽어도 못하는 사람을 비대면이 아니라 대면이 무방비로 뚫린 곳으로 옮겨놓았다.

나의 경우 비대면 적응 불능은 활자를 접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넷에 떠있는 저작물을 휴대전화로 들여다보노라니 도무지 진도가 나지 않는다. 전날 눈이 지나간 곳을 찾아도 가늠이 되지 않아 처음부터 돌아가기를 반복하기 일쑤다. 그러기를 벌써 여러 달째 하고 있다. 디지털 의존이 치매를 일으킨다고 주장한 연구에 따르면 웹을 통한 독서 행위는 공간이 빠져 있어서 기억으로 저장하는 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하니, 나는 그 말에서 용기를 얻는다.

4차 이후 산업의 핵심으로 각광받던 비대면 기술이 우리 일상에 이토록 빨리 육박한 데는 물론 감염병의 확산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학교 수업도, 행사도, 축제도, 택배 배송도 모두 비대면이다. 그럼 비대면은 대면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비대면으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비대면과 대면은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비대면 행사를 성사시키려면 관계자는 대면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행사를 준비하는 업무는 몸이 움직이고 신체 접촉이 긴밀한 대면 노동이며 이것을 비대면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비대면 행사는 대면·비대면 복합 행사 또는 비대면 기반 행사라고 해야 정확하다. 오히려 일선에서 뛰는 관계자한테는 비대면 행사는 대면은 대면대로 하면서 비대면도 하니 일거리만 폭발적으로 안겨줄 뿐이다.

그러나 비대면 행사가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는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으로 일해야 하는 현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고객이 안전하게 택배 물품을 비대면으로 전달받으려면 누군가는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물량을 처리하고 새벽에도 실어 날라야 한다. 물품을 받아 분류하고 싣고 나르고 내리고 전달하는 택배 기사의 모든 업무도 비대면으로 할 수 있어야 비대면이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지금의 비대면은 대면의 반대말이 아니라 대면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시)대면에 불과할 것이다.

손가락 몇 개 까딱까딱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비대면 노동은 극단의 경우 누군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노동일 뿐임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비대면 주문의 살인적인 증가는 택배 기사들을 실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한답시고 이참에 디지털, 웹, 온라인 기반 사회 전환이 도래했음을 선동하는 정부와 자본은 비대면의 참혹한 실상이야 어떻든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처럼 전자책도 읽을 줄 모르는 '디지털 문맹'이 도태되는 것도 걱정할 리 없다. 그런 건 부수적이거나 불가피한 폐해, 또는 디지털 웹 기반 문명을 구축하여 국가경쟁력을 세계 굴지로 끌어올린 뒤에 해도 되는 문제일 것이다.

흔히 비대면을 인터넷과 곧장 동일시하며 나 또한 이 글에서 그렇게 전제했지만 그건 비대면의 하나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비대면은 문자 그대로 얼굴을 대하지 않거나 신체 접촉을 최대한 줄이는 활동을 포괄하므로, 인류가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원숭이와 닮았던 시절부터 익숙하게 해왔던 것들이다. 손님이 띄엄띄엄 있는 동네 책방, 찻집, 술집 등을 이용하는 것,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을 다니는 것도 비대면 활동이다.

그럼에도 비대면의 본질을 우리가 예전부터 해왔던 오래된 미래가 아니라 아직 실체도 규명되지 않고 장밋빛 허황됨이 넘치고 사람 잡는 것에 두려고 애쓰는 자들이 있다. 코로나19를 빌미삼아 비대면을 한껏 허황하게 부풀려야 이익이 생기는 자들과의 싸움은 감염병과의 사투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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