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구한 눅눅한 자취방…대부분 끼니 편의점서 때워
초록우산재단 가재도구 지원…요리 통해 자존감·건강 회복

스무 살, 만 19세가 되면 누구나 법적 성인이 됩니다. 설레는 마음 한편에 혼란과 두려움을 안고 성년을 맞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위탁 시설·가정에서 자란 보호대상아동들입니다. 이들은 스무 살 즈음엔 시설을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자의'와 상관없이 '자립'해야 하는 이들이 사회에 무사히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경남도민일보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함께 답을 찾습니다. 보호대상아동 자립기를 한 달에 한 번, 네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어른 되고파 = 창원시 진해구 공동생활가정 출신 김종석(19) 씨는 올해 진주시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바람과 달리 남자기숙사가 없는 학교라 따로 집을 구해야 했다. 독립생활이 마음 같지만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개강이 계속 연기되는 바람에 자취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진주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3개월간 집안에 틀어박히다시피 했다.

종일 머물렀던 집이지만 안식처는 아니었다. 원래 있던 세탁기와 냉장고 외에는 생활용품도 없었다.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났고, 벽지는 울었다. 8만 원 가까이 나오는 난방비는 덤이었다. 이가 빠진 칼, 먼지가 떨어지지 않는 냄비 따위를 시설에서 챙겨왔지만 요리에 한계가 있었다. 음식을 자꾸 태워 먹다 보니 자연스레 편의점이나 집앞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다. 집은 그에게 우울한 공간이었다. 개강하고 친구들이 생기자 집에 들어오기 싫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어느 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자립지원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공기튀김기·제습기·온수매트·전기밥솥과 새 주방집기 등 살림살이를 지원받았다. 생활비가 쪼들려 그동안 엄두도 못 내던 물품들이다. 종석 씨는 "따뜻한 이불 속에 뛰어드는 감촉, 뽀송뽀송한 빨래, 요리하는 재미 등 그동안 몰랐던 소소한 행복을 찾게 됐다"며 "무기력하고 부정적이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종석 씨는 살림살이 지원을 받고,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언젠가 혼자서도 잘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감정이었다. 두 번째는, 혼자서만 살아남는 어른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사회복지 전반에 걸친 현실들을 자연스레 접하면서 살았다"며 "남보다 더 아는 만큼 앞으로도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삶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석 씨가 그리는 진정한 '자립'의 모습이다.

창원 공동생활가정을 떠나 혼자 자취방에서 살고 있는 김종석 씨. 제대로 된 가재도구 하나 없이 자립을 시작한 그는 배가 고프면 주로 편의점을 찾았다. 최근에 후원받은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를 활용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김종석 씨
창원 공동생활가정을 떠나 혼자 자취방에서 살고 있는 김종석 씨. 제대로 된 가재도구 하나 없이 자립을 시작한 그는 배가 고프면 주로 편의점을 찾았다. 최근에 후원받은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를 활용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김종석 씨

◇진로 향한 '첫발' 딛기까지 = 함양군 출신 최현지(20) 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지난해 무작정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갔다. 변변한 거처도 없었지만 서울에서 직장을 구한 소꿉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현지 씨는 좋아하던 음악을 더 배우고자 관련 학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등록금이 감당 안될 것 같아 취업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용감하게 서울에 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생활해보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데도 벅찼다. 현지 씨는 "음악 핑계를 댔지만, 그동안 함양을 벗어나지 않고 살다 보니 내심 더 넓은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진로를 찾을 기회가 필요했지만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코로나19 여파로 아르바이트 자리도 줄어 자립수당 30만 원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졌다. 보증금으로 쓰고 일부 남아있던 자립정착금도 점점 깎여나갔다.

올해 들어 네일아트라는 분야를 접하고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비용이 만만찮았다. 학원비와 재료비를 합치면 200만 원 가까운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 했을 때 마침 연락을 주고받던 자립지원전담요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자격증 취득비 지원사업에 신청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현지 씨는 지원을 받아 지난 9월 네일아트 자격증을 취득했다. 진로를 향해 내디딘 첫 발걸음이었다.

현지 씨는 "혼자 발버둥쳐도 이 길도 저 길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방황했다"며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갈피를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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