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 제조 직무로 계약 맺은 후 실제로는 기피 업무 '도장'맡겨
피부병 등 업무 연관 소견에도 사업장 변경은 하늘의 별 따기

거제 한 조선소 사내 협력업체 소속이던 네팔 노동자 ㄱ(29) 씨는 눈 주변 피부 건강 등이 나빠져 이달 초 일을 그만두게 됐다.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비자(E9)로 한국에 온 그에게 조선소는 첫 일터였다. 그러나 이 업체 배치부터 사업장을 옮기기까지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건강 악화에 회사 눈치까지 = ㄱ 씨는 1년 7개월간 이 업체에서 일했다. 주로 선박 도장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는 "도장 작업을 하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근로계약서 업무 내용에는 '△업종: 제조업 △사업내용: 선박 건조 및 관련 부품 제조 △직무내용: 기계·금속 분야 단순 종사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계를 다루면서 배를 만드는 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올 7월부터 ㄱ 씨는 눈 주변 통증과 가려움증, 목 부위 피부 발진과 가려움증 등이 심해졌다. 지난 9∼10월 피부과에서 접촉성 피부염, 결막염 진단을 받고 약물과 연고 치료를 했으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약을 먹고 일하기도, 잠자기도 힘겨웠다. 오히려 쉴 때는 증세가 사라졌다.

ㄱ 씨와 같은 네팔 노동자 ㄴ(28)·ㄷ(22) 씨도 도장 작업 후유증을 겪고 있다. 마스크를 써도 냄새가 독하다 보니 두통과 눈 주변 통증이 있다. 고개를 들고 키를 훌쩍 넘는 곳을 쳐다보면서 작업하기에 목이 아프고 간혹 가슴 통증도 생긴다. 아파서 일하지 못하거나 장대를 잡기 어려워 다른 일을 요구하면 "다른 사람도 아프다. 돈 벌러 왔잖아"라며 꾀병 취급을 하기에 답답하다. 출근을 못 하면 욕을 먹어 회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결국 ㄱ 씨는 회사를 옮길 마음을 먹었다. 좀 더 안전한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측은 사업장 변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명을 알 수 있는 소견서, 다음으로 몸 상태·진단명·진료 기록 등이 담긴 진단서를 요구했다.

이달 4일 ㄱ 씨는 거제 한 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소견서를 받았다. 여기에는 '도장 작업 특성상 여러 유기화합물·분진 등에 노출될 것으로 판단됨. 근무 중인 부서·공정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작년과 올해 상반기 꾸준히 혼합 유기화합물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됨을 확인함. 따라서 현 부서 근무 이전에 상기 질환의 증상·병력이 없었으며 근무 시작 후 경미한 증상이 유지되다 최근에 심해진 점, 업무 환경의 유해인자(유기용제·분진 등)가 상기 질환을 흔하게 일으킬 수 있다는 점, 같은 부서 동료들이 유사 증상이 있다는 점, 휴가 등 근무하지 않을 때 증상이 호전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상기 질환이 업무로 발생 혹은 악화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적혔다.

▲ /삽화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 /삽화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노조가 나서 해결했지만… = ㄱ 씨 사연을 전해들은 노동조합이 나섰다. 노조나 이주민 지원단체가 없으면 사업장 변경을 위해 회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사측은 노조에 보낸 공문에서 "같은 직종 노동자들에게 예방·피부보호 용품을 매달 보급하고 있으며, 근원적 조치는 사실상 어렵다"면서도 "고충을 인지한 만큼 절충안이나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면담 이후 치료·직무 변경·일시 휴직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도 했다.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최근 경기 악화로 특근과 초과근무가 감소함에 따라 사업장 변경을 요청하는 실정"이라며 "원인 불명의 이유로 이를 허가할 때는 더 많은 이가 사업장 변경을 요청할 것이고, 회사 경영에도 막대한 지장을 가져올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우선 노조는 '진단서 기재사항이 모두 담긴 소견서는 진단서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ㄱ 씨가 소견서 이외에 진단서까지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또 "작업환경측정 결과 해당 작업에서 페인트 등 유기용제 사용과 용접, 그라인더 등 분진이 기준치 이상으로 확인돼 (ㄱ 씨 건강 악화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주원인"이라며 "충분한 사업장 변경 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외국인고용법) 제25조는 '사업 또는 사업장 변경 허용'을 명시하고 있다.

김정열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부대표는 "위험의 외주화로 도장과 같이 국내 노동자가 꺼리는 일은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가 메우는 현실"이라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로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많은 산업재해가 은폐되면서 정부 통계는 엉터리로 잡히고 사업주는 여전히 산업안전보건법도 모른 채 재발 방지에는 손을 놓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다소 공방이 있었으나 ㄱ 씨와 노사는 간담회를 거쳐 근로계약 해지를 마무리했다. 현재 ㄱ 씨는 다른 지역에서 재취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에는 "감사하고 항상 기억하고 계속 연락하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ㄱ 씨는 비자 체류기간인 4년 10개월 이상 일해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네팔로 '건강하게'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ㄱ 씨와 동료들이 말했다. "여기(한국)서 나빠지면 네팔에 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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