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변기 커서 앉기 힘들고 세면대 높아 손씻기 못해
부모 98.2% "개선 절실"…아동권리 보장 기초 수준

1989년 유엔이 채택한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이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국가는 아동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여러 시설 가운데는 체구가 작은 어린이가 이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 공중화장실도 그 가운데 하나다.

11월 19일 세계 화장실의 날을 앞두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함께 경남 도내 일부 공중화장실 실태를 살폈다.

◇어린이에겐 '너무 높은' 공중화장실 = 지난 15일 오후 3시 30분께 밀양시 삼랑진읍 꿈샘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과 함께 삼랑진역·읍사무소 등 주변 공중화장실을 직접 둘러봤다.

이지민(8) 양은 체구가 작아 성인용 좌변기에 제대로 앉을 수 없었다. 변기가 커 자칫하면 엉덩이가 빠질 정도였다. 세면대 거울도 높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김겨레(11) 군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변기 문에 달린 옷걸이에 손이 닿지 않았다. 겉옷을 항상 입고 다니는 겨울에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 밀양의 한 공중화장실을 김겨레(11) 군이 찾았다. 문에 달린 옷걸이는 손을 뻗어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달려있다. /이창우 기자
▲ 밀양의 한 공중화장실을 김겨레(11) 군이 찾았다. 문에 달린 옷걸이는 손을 뻗어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달려있다. /이창우 기자

아동용 세면대가 설치된 화장실도 있지만, 정작 손 세정제나 건조기는 어른 기준 높이에 있는 곳이 많았다. 아동들은 까치발을 세우며 안간힘을 써야 이용할 수 있다.

키가 작은 아동은 화장실 감지등(센서)이 인식하지 못해 불이 안 켜질 때가 잦아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털어놨다. 국민 누구나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공중화장실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높은' 벽이었다.

◇부모 절반 '공중화장실 어린이 불편은 차별' = 경남아동옹호센터는 아동이라서 겪는 다양한 차별 중 '공중화장실'에 초점을 맞추고 현실 개선을 촉구하는 '별의별 차별이야기' 활동을 하고 있다. 이날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이 모인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인식은 경남아동옹호센터가 지난 9월 설문조사를 통해 학부모 의견을 물었을 때와 거의 비슷하다. 4~9세 자녀가 있는 부모 112명 중 74.1%가 높은 세면대에 불편함을 호소했고, 31.3%가 아동용 소변기가 없다는 점, 30.4%는 손 세정제·휴지걸이 위치가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응답한 부모 가운데 절반(50.9%)은 이를 '어린이 차별'이라고 생각했고, 98.2%가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사에 참여한 안기정(42·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씨는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 남자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남자화장실에 아동용 소변기가 없어 항상 여자화장실로 데리고 오는데 소변기에 칸막이가 없다"며 "아이가 클수록 부끄러워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 김모(33·함양군) 씨는 "딸아이와 함께 공원에 산책을 나왔을 때, 남자화장실에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민망하고, 성교육에도 좋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공중화장실에는 장애인화장실처럼 가족화장실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밀양의 한 공중화장실을 이지민(8) 양이 찾았다. 세면대 옆에 있는 거울이 어른들만 이용할 높이로 설치돼 있다. /이창우 기자
▲ 밀양의 한 공중화장실을 이지민(8) 양이 찾았다. 세면대 옆에 있는 거울이 어른들만 이용할 높이로 설치돼 있다. /이창우 기자

◇아동친화적 공중화장실 늘려나가야 =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은 자연공원·도시공원, 공공역사, 공공기관, 대형마트(3000㎡ 이상의 대규모 점포), 주유소 등 사유시설 화장실까지 포함해 '공중화장실 등'으로 규정하고 어린이용 대·소변기 설치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설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아동의 사용성까지 고려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 시행령에 따르면 소변기·세면대는 '어린이가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은 높이'라고 명시돼 정확한 높이 기준이 없다. 옷걸이나 세정제·휴지걸이 등에 대한 세밀한 규정도 빠져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전국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2009년 전국 최초 어린이전용화장실을 설치했다. 2018년 강북구청은 화장실에 어린이용 변기 덮개를 씌웠고, 양천구는 관내 공중화장실 19곳에 가족화장실을 만들었다. 전북 완주군은 350여 개 공중화장실에 낮은 옷걸이를 설치했다. 경남도교육청 역시 학교 화장실이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아동 의견을 반영해 소변기 가림막 설치·문걸이 보수 등 환경을 바꿔나가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남아동옹호센터는 19일 세계 화장실의 날을 맞아 '아동친화적인 지역사회 공중화장실'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경남도를 비롯한 각 지자체에 △아동용 세면대·발판 △낮은 옷걸이 △아동용 변기 혹은 변기 덮개 △아동 인식 감지등 설치 등의 개선책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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