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으로 물든 하던마을 골목
오감 일깨우는 매암차박물관 눈길

쉼표는 문장과 낱말에서, 악보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쉼을 제공한다. 이번 하동군 악양면 여행은 일상의 쉼표와 같았다. 올 한 해 별로 한 게 없는데 시나브로 한 해의 끝자락이 왔고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은 붉은빛, 주홍빛,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다. 악양면 풍경은 은은한 차 향기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한 해의 마침표를 잘 찍을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다.

악양면 하면 평사리 최참판댁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석 같은 곳이 숨어 있다.

▲ 하덕마을. /이서후 기자
▲ 하덕마을. /이서후 기자

하덕마을은 풍경을 화폭에 담은 산수화처럼 빼어나다. 악양 십이경(十二景) 중 하나다. 예로부터 마을 앞 옥산(玉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맑은 안개가 저녁에 지는 햇빛에 청홍색(靑紅色)이 영롱했다.

현재는 골목마다 예술작품으로 물들었다. 악양의 화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정서운 어르신을 기리고자 야생차를 주제로 만든 마을 골목 갤러리인 '하덕마을 섬등갤러리'다. 섬등은 육지나 섬처럼 여겨지는 곳을 지칭하는 하동의 지역말이다. 골목 갤러리에는 경계를 아울러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이 만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뜻이 담겼다. 이 밖에도 최참판댁 입구에서부터 하덕마을까지 이어지는 길 곳곳에 '2018 마을미술 프로젝트'로 설치된 다양한 미술작품도 있다. 이 중 빈집에 설치된 이정형 작가의 '비치다'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빈집이 되기 전 이곳은 약방, 구멍가게, 만화방, 나락가마니를 쌓아두었던 창고였다. 다른 지역 벽화마을과 달리 한적하고 작품이 뻔하지 않아 좋다.

악양초등학교의 풍경은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학교는 1922년 개교했다. 이후 매계·축지초등학교 3개교로 분리했으나 학생수 감소로 1998~1999년도 다시 악양초등학교로 통합됐다고 한다. 학교 정문 너머 펼쳐진 동그란 운동장과 나이가 꽤 되어 보이는 나무들, 책 읽는 소녀상,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정겹다. 돌계단에 앉아 적당히 부는 바람을 맞으며 그 바람에 흩날리는 단풍잎을 보고 있으니 잠들었던 감성 세포가 깨어난다.

▲ 매암차문화박물관. /이서후 기자
▲ 매암차문화박물관. /이서후 기자

이럴 땐 따뜻한 차가 필요하다. 매암차문화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매암제다원이 지난 2000년에 개관한 사립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하동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집집마다 차를 만들어 마셨고 열에 일고여덟 집은 홍차를 만들어 마셨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목조주택을 개조한 곳에는 다구를 전시한 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는 유기농 차를 맛볼 수 있는 매암다방이 있다. 차밭을 배경으로 야외에서 다기를 이용해 차를 마실 수 있다. 전망과 풍경이 좋아 '풍경 맛집'으로 불린다. 산뜻한 풀꽃향이 가득한 홍차를 한 잔 마시며 차밭 가운데 빨갛게 익어가는 감나무를 본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어 종착지는 하동에서 지역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구름마다. 구름마는 하동으로 귀촌한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지리산문화예술사회적협동조합이다. 하동의 다원예술순례, <여행그림책> 출간, 섬진강바람영화제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역의 문화를 꽃피운다. 구름마 사무실이 있는 악양생활문화센터 1층에는 악양작은미술관이 있어 전시를 볼 수 있다.

▲ 구름마가 만든 책들. /이서후 기자
▲ 구름마가 만든 책들. /이서후 기자

 

악양 토박이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장

"안 만져서 예쁜 공간."

하동에서 만난 강동오(54·사진) 매암차문화박물관 관장은 악양면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악양면은 하동 토박이인 강 관장의 표현처럼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아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였다. 하동을 대표하는 3개의 봉우리(형제봉, 칠성봉, 구재봉) 한가운데 둘러싸여 있어 멋스러운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장. /이서후 기자
▲ 강동오 매암차문화박물관장. /이서후 기자

강 관장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악양면이어서인지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시간 저 너머의 공간을 연결하는 공간이 악양면이다"며 "전시관으로 쓰이는 박물관 옆 유물전시관에서 태어난 뒤 줄곧 악양면에서 자랐는데, 악양면은 먼 시공간에서부터 내려온 많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운영하는 매암차문화박물관 옆에는 푸르스름한 색감이 감도는 차밭이 자리 잡고 있다. 강 관장이 소유한 1만 7520㎡(약 5300평) 규모의 밭이다. 그는 이곳에서 찻집도 운영 중인데, 그 주변으로 보이는 자연 풍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정서리에서 박물관과 찻집, 차밭을 운영하는 강 관장. 그에게 악양면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일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악양면은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합일의 공간이 악양면이다."

 

이혜원 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 대표

문화예술 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를 이끄는 이혜원(51·사진) 대표는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악양면 축지리 악양생활문화센터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구름마는 그림 전시공간과 회의시설을 지역민들에게 대여해주거나 목공, 미술, 현대무용, 맵시글(캘리그래피) 수업 등을 열어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사업을 진행하는 협동조합이다. 악양면에 거주하며 구름마 대표로 활동하고 있지만, 하동 출신이어서 악양면에 터를 잡게 된 건 아니었다.

▲ 이혜원 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 대표. /이서후 기자
▲ 이혜원 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 대표. /이서후 기자

서울 토박이 출신인 이 대표는 2013년부터 서울과 하동을 오가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드라마 촬영지 최참판댁에서 지인들과 아트숍을 운영하다 지난 2017년 어머니와 함께 하동에 정착했다. 하동에 정착한 건 올해로 3년째가 됐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이 대표가 악양면만의 매력으로 느낀 점은 무엇일까.

그는 차 마시는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경관 등을 꼽았다. "차를 마시고 찻잔 자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문화가 좋았다. 이런 문화는 이곳에 와서 처음 경험했다. 자연경관과 기후도 매력적이다. 예술인들이 많은 사는 지역이라는 점도 장점이다. 행정이 갇혀있고 지역 사람들 간 작은 갈등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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