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수가 보이지 않는 지금
최선을 다한 한 수로 기쁨 얻어

달력을 보니 2020년 경자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춘삼월 시작된 코로나19는 입동이 거지반 다가왔는데도 스스로 물러갈 기미가 없다. 외국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마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다.

지금의 시기는 마치 얼마 전 두었던 비대면 인터넷 바둑에서의 끝내기 단계와 유사하다. 형세는 여의치 않고 역전의 수는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집을 헤아려보니 선수(先手) 끝내기와 역선수(逆先手) 끝내기 등을 해보아도 반면으로 서너 집 부족한 상황, 가을밤은 깊어 가고 컴퓨터 모니터에 내뱉는 나의 한숨 소리도 깊어지고 있었다.

장고 끝에 좌상귀 사활에 관한 선수를 놓고 화면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불현듯 매월당 김시습의 인생 백년이 한 판의 바둑 같다던 바둑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생 백년이 한 판의 바둑 같고 모든 기약이 눈 깜짝할 사이로다

두 귀가 빨개지도록 크게 한 번 취해 보는 게 어떨까

산골 아이가 일찍 가자고 하네 내가 돌아가면 응당 조용하겠지

 

나는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김시습이 바둑을 두었다던 설악산 와선대로 여행을 떠났다. 와선대는 옛날 마고선이라는 선인이 여러 신선들과 이곳에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선인들은 놀기에 지치면 바위에 누워 설악산의 절경을 즐겼다고 해서 와선대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었다. 바탕화면을 와선대로 바꾸었다. 상대의 착점하는 소리가 들려 Alt+Tab을 눌러보니 좌상귀 사활에서 손을 빼 다른 곳에 두는 것이 아닌가. 상대방은 손을 빼도 살아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으나 패가 나는 곳이었다. 나는 좌상귀를 잡으러 갔다. 상대는 몇 수 두어보더니 돌을 거두고 나가버렸다. 예의상 "잘 두었습니다"라고 쓴 후 나가는 것이 통상적인데 말이다.

상대의 어이없는 실수로 승리를 차지했지만 영 기분이 찜찜했다. 내가 잘 두어서가 아니라 상대의 실수로 인해 쟁취한 승리는 이겨보았자 큰 즐거움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상대 대국자에게 쪽지를 보냈다. "제가 던져야 하는 형세였는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곧 답장이 왔다.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 둬서 그런 걸요."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간 후, 우리는 모일 모시에 다시 대국을 하기로 약속했다.

언택트 시대에 좋은 바둑 친구가 생겼다. 모월 모시에 그와 만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신의 한 수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한 수, 부끄럽지 않은 수를 두어야겠다. 이규보의 바둑시로 휘영청 달 밝은 가을밤을 바둑통에 쓸어 담는다.

 

내가 지난 대국에서는 기러기 생각에 정신이 팔려 일부러 잠깐 진 것일세

식은 재에도 반드시 불붙는 날 있는 법 궁지에 몰린 짐승은 오히려 기회를 노린다네

패세에는 모름지기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고 지나서 분한 마음은 허공에 날려버려야지

금구 청제는 우리 분수에 없으나 이다음 대국은 부슬부슬 밤비 내릴 대로 약속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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