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산청 마을 배경
현실·과거 오가는 판타지 형식

이건 분명 해원(진혼)을 위한 판타지 소설이다.

오랜 공직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한 소설가 겸 싱어송라이터 이인규의 소설 <지리산에 바람이 분다>(전망, 2020년 9월)를 읽고 든 생각이다.

▲ 〈 지리산에 바람이 분다 〉이인규 지음
▲ 〈 지리산에 바람이 분다 〉이인규 지음

이 소설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자락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작가 나름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역사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을 취한 게 독특하다.

"이 지역(산청)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라는 통한의 역사가 버젓이 존재합니다. 마침 이 문제를 모티브로 하여 집필을 시작(경남문화예술진흥원 입주 작가 활동 시)하려 할 때, 경남민예총을 비롯한 경남작가회의, 산청문인협회, 유족회 등 여러 단체에서 이 주제를 끄집어 내 문학으로 승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는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새기면서, 제 나름대로 이 문제를 다른 주제와 함께 엮어, 풀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작가의 말)

소설은 지리산 자락 한 마을이 배경이다. 마을 근처 울창한 숲 사이 한짓골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비극적 역사가 남긴 원한이 잔뜩 서려 있다.

"한짓골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의 원천이자, 금단의 땅이었다. 공식적인 자료는 없지만, 이곳은 박 씨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다. 순박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억울하게 자신들의 군대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들은 거의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다. 귀신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그곳에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존재했다." (72쪽)

여러 증언에서 확인된 적이 있는데,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신을 옭아맨다. 소설 속 안성댁의 기억처럼 말이다.

"어느 날인가, 그날따라 철쭉이 만발할 때쯤 산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쳤어. 마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이 말한 장소로 모였지. 거기가 어디냐고? 한짓골이었어.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마치 소풍을 가듯 그곳으로 가서 꽃을 구경했지.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 손에 땀이 너무 흐르는 거야. 그래서 엄마더러 왜 이리 땀이 많냐고 물어보는 순간, 천지가 울리는 굉음이 들렸어. 나도 넘어지고 엄마도 쓰러졌어. 잠시 후에 일어나 보니 엄마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몸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 있었어. 옆에 보니 내 또래 아이들도 죽어있는 거야." (22~23쪽)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건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 당시 국군이었던 아버지의 일기를 보자.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순 없다. 아니,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이렇게 해선 안 된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라니.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아이들도 있었다.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어 허공에 총을 갈겼다. 그러다 내 등허리에 갖다 댄 김 중사의 총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노인과 아녀자들이 내 총알에 쓰러졌다. 나의 정의 나의 양심, 나의 삶은 이것으로 끝났다." (60쪽)

소설을 읽다 보니 <곡성>, <이끼>, <시실리> 같은 영화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종교, 퇴마의식, 전통문화, 추리를 통한 사건 해결 같은 다양한 소재와 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이렇게도 풀어볼 수 있구나 싶어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리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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