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사람·지명 눈에 담고 삼랑진서 물금 거쳐 사찰로
작가의 색다른 세계관 눈길…공간이 갖는 의미 돌아봐

양산에 오고 그해가 다 가서야 안부를 묻는 무심한 친구가 있었다.

"어디에 있다고?"

"양산에."

"아, 통도사!"

양산에 온 지 1년이 지나도록 그 유명한 통도사에 가 볼 생각을 안 하다니, 친구만큼 나도 무심했다. 신평 가는 버스를 탔다. 신평터미널에 내려 통도사 가는 길을 물었다. 청년은 택시를 타라고 했고, 어르신은 구경삼아 걸어가라고 했다. 그것이 1999년이다.

<통도사 가는 길>이 조성기의 작품 중 어디쯤 위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있어서만은 대표작이다. 이 소설이 계기가 돼 밥벌이의 핑계와 무심한 성정을 극복하고 내가 사는 양산에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게 됐다. 많은 소설이 그렇듯이 <통도사 가는 길>에도 자전의 요소가 있다. 1인칭 소설의 화자를 작가 그대로 칭하는 것이 오독인 줄을 알면서도 화자를 작가 조성기로 칭하며 그의 '통도사 가는 길'을 따라나선다.

◇삼랑진, 넘실거리는 물만큼 하 수상한 시절들

조성기는 서울에서부터 시작했지만 나는 삼랑진에서부터 따라가기로 한다. 기찻길은 삼랑진에서 부산과 광주로 갈라진다. 삼랑진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출발역이고 종착역이며, 경부선으로 갈아타는 역이다. 그리고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언저리에 자리한 역이기도 하다. 세 갈래 물줄기가 모인다는 삼랑진은 그 이름값대로 종종 큰물이 들었고 역이 잠기고 기차가 멎곤 했다.

""저것 보게. 저기 저 집들이 반이나 잠겼습니다 그려!" 하고 마산선으로 갈려 나가는 길가에 있는 초가집들을 가리킨다. 과연 대단한 물이로다. 좌우편 산을 남겨 놓고는 온통 시뻘건 흙물이로다. 강 한가운데로 굼실굼실 소용돌이를 쳐가며 흘러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 물들이 좌우편에 늘어선 산굽이를 파서 얼마 아니 되면 그 산들의 밑이 빠져 나갈 것 같다."

-이광수 <무정> 중에서

큰물로 삼랑진에서 기찻길이 끊어진다. 주인공 일행은 기찻길이 막힌 삼랑진에서 자선음악회를 열고 교육으로 부국하게 할 것을 다짐한다. 이광수의 친일 명성(?)만큼이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장면이다. 작위적이고 계몽적이어서 문학으로서는 민망할 지경이지만, 수해를 입은 공간으로 삼랑진을 설정한 것은 매우 핍진하다. 1916년 큰비로 삼랑진~진영~마산의 철도가 끊어졌다 복구되었다(매일신보 1916년 7월 4일 자 2면). 소설 <무정>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또 삼랑진은 김정한의 소설 <뒷기미나루>의 배경이기도 하다. 뒷기미나루는 삼랑진에서 밀양강을 건너는 작은 나루이다. 소설에서 "그해 여름의 큰물에, 뒷기미 나룻배를 부리던 춘식이 할아버지가 불행히도 떠내려갔기 때문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소설 <뒷기미나루>의 시대 배경이 해방 후이다. 이념의 비극과 위협적으로 넘실거리는 물이 겹치면서 시절의 아픔이 공명된다.

그리고 조성기가 <통도사 가는 길>에서 본 삼랑진은 이랬다.

"저쪽 여러 줄기의 선로 너머 낡은 담벼락 옆에는 시커멓게 마른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사일로 구조물이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자꾸만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 썩어들어가는 양철지붕을 그대로 이고 있는 그것은 어떻게 보면 버려진 망루와도 같이 여겨졌습니다."

조성기가 급수탑을 '버려진 망루'처럼 여긴 데에는 삼랑진역이 4·19교원노조로 끌려간 아버지의 기억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게다. 소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국 이십만의 교사들 중에서 교원노조 간부 천오백여 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대량 검속"하던 시절에, 조성기의 부친은 "골수분자 오십사 명"에 해당돼 "군사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감옥살이의 길을 전송한 곳이 삼랑진역이었다.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위헌적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해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인사들을 무차별 구속했다. 조성기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원노조 위원장으로 투쟁을 하다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감옥으로 가게 된 사건"이 자신이 소설가이게 했다고 했다.

▲ 양산 통도사. /이헌수 시민기자
▲ 양산 통도사. /이헌수 시민기자

◇가장 아름다운 기찻길, 삼랑진에서 물금

문학 작품 속에 그려진 삼랑진의 이야기는 무겁지만 삼랑진에서 물금으로 이어진 기찻길은 아름답기로 이미 짜하다. 우리나라의 최고 답사가 유홍준은 그의 대표 저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삼랑진에서 물금에 이르는 경부선 철길이 가장 아름답다"며 "삼랑진부터 자못 위용을 갖추니 여기부터 물금까지 도도히 흘러내리는 모습은 차라리 장중한 교향악 같다"고 했다.

조성기가 본 물금으로 가는 철로변의 모습은 이랬다.

"오른편으로는 맑고 푸른 낙동강이 흐르고, 왼편으로는 싱싱한 대나무밭, 진달래, 뽀얀 복사꽃, 개나리, 매화꽃 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물이 오르고 있는 부드러운 수양버들, 봉오리를 펼칠 채비를 차리고 있는 목련들도 보였습니다. 산자락 양지에 무심히 자리잡고 있는 초가집 몇 채는 산에서 자생하는 큰 버섯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내 기억 속 물금~삼랑진 기찻길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있다. 몇 해 전 체험학습을 가기 위해 기차를 이용했다. 체험과 학습의 내용도 있었는데 학생들은 체험학습이니 소풍이니 하는 말 대신에 기차여행이라 불렀다. 반 학생들 중 기차를 타 본 학생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여행이라 부르는 것만 봐도 그들의 설렘을 짐작할 만했다. 학생들은 설렜고, 담임인 나는 학생들의 설렘으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한 량의 기차간에 우리 반 학생들이 절반이었다.

끊이지 않는 수다와 부모님이 챙겨줬다는 기차여행의 별미인 사이다와 삶은 계란으로 기차간은 난장이었다. 창 밖의 풍경에 눈길 돌릴 짬이 없었다. 하루를 놀고 물금으로 돌아오는 기차간은 조용했다. 지쳐서이기도 했겠지만 삼랑진을 지나며 서쪽 산 너머부터 붉어진 하늘이 낙동강물에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강과 산과 하늘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했다.

◇물금, 지명 유래의 '썰(說)'들

조성기는 물금역에 내리며 역명 표지에 쓰인 물금의 한자를 본다. 아니 물(勿), 금할 금(禁). '참으로 희한한 한자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물금의 지명 유래가 어떠했든 그에게는 '금하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는 마음이었다.

"물금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지요. 거기 자전거포 옆 공지에서 서커스 천막 같은 것이 쳐져 있기도 했지요…약장수가 약선전을 하는 천막인데도 남자 석과 여자 석을 엄격히 구별해 놓다니. 그런데 물금 사람들은 한 사람도 어김없이 그 구분을 지키고 있었지요."

'금하지 않는 세계'는 이름뿐이고, 실상은 금지에 순종적인 민초들의 세계였던 셈이다. 명명하고 호명한다는 것이 발화자의 바람이듯이,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수신자의 소망인 듯싶다. 조성기는 금지를 넘어서고 싶었을 것이다. 지명의 유래라는 게 워낙에 많은 '썰(說)'들이기는 하지만 지역을 이해하는 데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몇 개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勿을 물 水의 음차로 보아 '물을 금하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메기가 물 냄새만 맡아도 홍수가 진다는 메깃들의 이름과 맥이 닿아 민중의 소망이 담긴 풀이는 생활적이다. '금하지 않는다'는 한자를 직역해 유래를 주장하기도 한다. 가야와 신라의 경계 지역임을 빌미로 나라 사이의 무역을 금하지 말자는 가야·신라FTA(자유무역협정) 유래설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낙동강이 물금에서 마지막 굽이를 돈다. 강물이 굽어 돈다는 의미의 '물고미'가 '물금'이 되었다는 언어의 역사성에 기댄 설명은 학문적이다.

◇통도사 가는 길

조성기는 '물금 버스정류장에서 백칠십 원의 찻삯을 내고 양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양산교를 지나니 곧장 버스 종점에 닿았다'. 통도사에 가려면 양산터미널에서 신평 가는 버스를 또 갈아타야 했다. 그가 내린 버스터미널 자리에 지금은 은행이 들어섰고, 터미널은 두 번을 더 옮겼다.

조성기는 '크고 깊은 울림'이 있는 절 이름만으로도 '가장 큼직한 절'일 거라 생각한다.

'통도'라고 소리 내어 보면 바람이 몸 안에 머물며 울림이 되는 듯하다. 매표소가 있는 문이 '영취산문(靈鷲山門)'이다. 무풍한송길을 따라 '영취총림(靈鷲叢林)' 문을 지나면 흥선대원군이 썼다는 '영취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현판이 달린 일주문에 이른다. "절의 첫 문인 일주문을 지나고 둘째 문인 천황문을 지나고 셋째 문인 불이문을 지나 탁 트인 경내"에 들어섰다. 그는 절 곳곳을 둘러보고 그 가운데에서 본 것은 '단아한 허공'이었다.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 조성기는 날이 어둑어둑해져야 걸어서 절을 나선다.

"통도사에서 멀어질수록 절 뒤편 영취산이 점점 높아지고 우람하게 보였습니다."

조성기는 이 소설을 시작하며 '나는 왜 통도를 '通道'로 알았을까'라고 자문했다. 소설의 끝에서 '通道가 아니라 通度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다. 그가 겪은 '형이상학적 질병'을 생각하면 조성기는 '사실'을 안 것 이상을 본 듯싶다. 그를 따라 통도사 가는 길을 꾹꾹 밟아는 왔지만 그가 겪은 '질병'만큼을 겪지 못한 나는 여전히 道와 度의 다름을 깨닫지 못하고 한자어 풀이만 뒤적인다.

☞소설가 조성기
조성기는 1951년 경남 고성에서 나고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1971년에 등단했으나 '형이상학의 질병에 걸려' 방황했다. 그가 말한 '형이상학의 질병'은 종교 혹은 신의 문제였다. 1985년에 문단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삶의 공간에서도 정신의 공간에서도 정주하지 못했다. 요즘 유행하는 노마드적 삶은 조성기에게는 오래된 유행이었던 셈이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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