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해고-투쟁 연속
창원·군산·부평 다를 바 없어
고용불안 스트레스로 '벼랑 끝'
삶과 죽음 사이…위태로운 삶

2005년 이후 계속된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는 까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외치는 이들이 있어서입니다. 배성도(40)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지난해 해고된 배 지회장이 인천 부평공장과 전북 군산공장을 오가며 연대하는 모습도 담습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뭔지 같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라며 8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지난 이야기 : 2008년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으로 재입사한 성도. 2014년 12월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기는 걸 본 성도는 노동조합 문을 두드렸다. 대의원, 정책부장을 거쳐 2019년 말 지회장이 된 성도. 하지만 성도 앞에 닥친 현실은 '해고'였다. 군산에서 김교명 전 군산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을 만나 비정규직 문제를 진단한 성도는 연대를 다지고자 인천 부평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남 = 비정규직은 죽음과 가깝다. 창원행 KTX에 몸을 실은 성도는 임권수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 지회장과의 만남을 되새겼다.

복잡한 고용구조, 정규직 전환의 외면, 위험의 외주화로 대변되는 비정규직의 죽음은 매시간 산업현장에서 발생한다. 통계자료를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비정규직 사망'과 같은 키워드를 넣고 뉴스 검색만 해 봐도,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10대 건설사가 원청으로 참여한 건설현장에서 다치거나 숨져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사람 10명 중 9명은 비정규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떠난 자리가 3개월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도로공사 비정규직 산재 부상 비율은 정규직의 9배다'. '다녀오겠다'는 말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게 비정규직이었다. 기사를 검색하다가 성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

▲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투쟁 모습.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투쟁 모습.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부평공장 = 지회장이 되고 나서 성도는 한국지엠 비정규직에 대한 자료를 수시로 모았다. 비정규직이 겪은 모진 세월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KTX 안에서 성도는 부평지회를 돌이켜봤다.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는 2007년 9월 노동조합 깃발을 올렸다. 한국지엠 글로벌 정책에 따라 모듈화, 외주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해고되거나 일터가 공장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잦아지면서다. 사측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모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창원에서 비정규직노조 깨기 경험이 있었던 사측은 업체 폐업 등의 방식으로 비정규직 조직화를 와해했다. 부평 비정규직지회는 노조 건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절반가량이 해고되는 아픔을 맛봤다. 남은 현장 조합원은 사측 압력에 못 이겨 노조를 탈퇴했다.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는 부평공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부평공장에서는 1000명 이상의 비정규직이 해고됐다. 한국지엠은 환율변동에 따른 손해가 2조 원이 넘는다고 말했고, 그 책임을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로 만회하려 했다.

해고-투쟁. 창원·군산·부평 다른 곳이 없었다. 공장 밖으로 밀려난 부평 비정규직지회는 투쟁을 지속해 2011년 회사와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2013년부터는 현장에 배치돼 활동을 시작했고 조합원도 늘렸다. 2015년 1월에는 창원·군산지회와 함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도 참여했다. 2016년 사측은 물량 감소를 이유로 인소싱 시도를 했지만 지회는 투쟁으로 맞섰고 인소싱을 저지했다.

끝은 없었다. 한국지엠과 사내 하청업체가 계약을 갱신하는 연말이었다. 원청이 계약 해지를 통보하면 하청업체 소속인 비정규직 근로계약도 바로 종료됐다. '한국지엠이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원청은 귀를 닫았고, 비정규직은 겨울철 해고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2017년 연말 부평공장 해고는 다시 시작됐다. 한국지엠은 경영위기와 한국 철수론을 앞세웠다. 2017년 엔진공장과 차체 공장 인소싱 과정에서 13명이 해고됐고, 2018년 2교대가 1교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13명이 또 떠났다. 인천KD센터(수출포장) 폐쇄로 11명도 직장을 잃었다. 2019년에는 인천부품물류센터가 폐쇄되면서 1명이 해고됐다. 이 숫자는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에 한한 것이었다. 소리 소문 없이 잘려나간 비정규직 수는 최소 수백 명이었다.

◇바람 = 비정규직지회는 끈질기게 싸웠다. 2017년 11월 천막농성에 들어갔고 26일간 집단 단식 투쟁도 했다. 인천지역연대, 민주노총 인천본부 등과 연석회의를 결성해 해고자 복직에 머리를 맞댔다. 9m 높이 철탑에서 61일간 투쟁하면서는 '해고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을 알렸다. 전환배치로 자리를 보전받는 정규직과 달리 업체 폐업 방식으로 해고당하는 비정규직의 서러움, 1교대 전환에서도 무급휴직을 강요받는 처지를 밝히며 싸웠다.

모진 세월 뒤 웃음도 있었다. 올해 해고 비정규직 46명 중 24명이 복직한 데 이어 2015년 사측을 상대로 냈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항소심에서는 6월 승소했다. 여기에 고용노동부는 지난 9월 한국지엠에 부평·군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라고 지시도 했다. 대상은 부평공장 797명, 군산공장 148명. 한국지엠은 10월 27일까지 직접고용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데, 이행하지 않으면 1인당 10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성도는 부평공장 주변에서 퍼지는 긍정이 창원공장 비정규직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투쟁 모습.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투쟁 모습.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지회

◇죽음 = 성도가 감은 눈을 떴다. 긴 터널을 지나면서 임권수 부평지회장이 말한 죽음이 다시 떠올랐다.

2019년 11월 30일 오전 8시께 한국지엠 부평공장 비정규직 노동자가 도장부 사무실에서 구토 증상을 보이며 쓰러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등 응급조처 후 병원으로 노동자를 옮겼으나, 그는 결국 숨졌다. 얼마 후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구두소견을 토대로 "(이 노동자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06년 한국지엠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그는 10년이 넘게 정규직이 꺼리는 공정에서 파견노동자로 묵묵히 일했다. 2018년에는 부평2공장 1교대 전환으로 순환 무급 휴직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2018년 10월부터 그해 연말까지는 유급-무급을 번갈아가는 격주 근무를 했다. 2019년에는 한 달씩 유급-무급으로 하는 격월 근무를 했다. 사망 당시였던 11월 그는 한 달간 휴일도 없이 일했다. 평일 기본 8시간 근무를 하고 잔업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주말에는 부평공장에 새롭게 투입되는 노동자를 가르치고자 직장 내 교육훈련을 맡았다. 일이 없는 짝수달, 그는 생계를 유지하고자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택배 분류·배달,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그의 유품 중에는 컵라면도 있었다. 서울 구의역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 유품에도 있었던 그것.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겨온 비정규직 노동자 삶이 거기 있었다.

지회는 진상 조사·책임 규명을 위한 대책위를 구성했다. 지회는 숨진 노동자가 불법적인 파견노동자 삶을 살아왔고 고용 불안과 순환 무급휴직에 따른 불규칙한 생활, 경제적 부담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강조했다. 유해물질 흡입 등 열악한 근무환경이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며 사측을 규탄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뒤, 근로복지공단은 이 노동자 사망이 업무상 사고에 해당한다며 유가족이 제기한 산업재해 신청을 승인했다. 고용불안에 따른 스트레스와 과로. 비정규직을 죽음으로 내몬 건 결국 시스템이었다.

"2006년 윈스톰과 토스카가 잘 팔리기 시작하면서 부평공장에서 비정규직을 왕창 뽑았죠. 저는 그때부터 부평공장에서 일했어요. 입사 동기였던, 제일 친했던 친구가 있었죠. 도장부에서 방독면 쓰고 13년 넘게 묵묵히 일하던 친구였어요. 그 친구가 지난해 현장에서 숨을 거뒀네요. 지회장직을 수락한 건 그 일 이후예요. 너무 화나고 억울해서. 꼭 바꾸겠다고."

임 지회장의 말을 곱씹으며 성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죽음을 등에 지고 출근하는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 비정규직이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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