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없이 뻥 뚫린 4㎞ 길 따라
높은 봉우리 파노라마 펼쳐지고
악양 들판 추수 풍경 활기 더해
상류에 이르면 물고기떼도 만나

악양면에 가면 항상 축지교에서 악양천을 건넌 후 악양 들판을 가로지릅니다. 그때마다 축지교 끝에 서서 들판과 그 너머 형제봉 자락으로 이어진 풍경을 바라보곤 하죠. 그러면 축지교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하천 제방길로 자연스레 눈이 갑니다. 하천을 따라 완만하게 휘어져 있어, 악양 들판을 바둑판처럼 나눈 농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악양면을 둘러보는 여정이 형제봉 자락에서 면 소재지를 지나 칠성봉과 구재봉 자락으로 넘어가기 전에 쉼표 같은 기분으로 이 제방길을 걸어봤습니다.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br /><br />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우뚝한 산들의 어깨동무를 바라보며 = 제방길을 걸으니 새삼스레 악양천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냥 스쳐 지날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들판 곁을 지나는 물길이 꽤 넓고 듬직합니다.

악양천은 거사봉과 시루봉 자락에서 시작해 하류 즈음에서 악양 들판을 만들고 나서 섬진강으로 흘러듭니다. 악양 들판 한가운데를 지나는 건 아니고요,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흐릅니다. 전체 길이가 10.5㎞인데, 악양 들판 구간은 그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면 소재지를 지나 상류 쪽으로도 꽤 깊숙이 물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방길이라고 하면 평사리 공원 건너에서부터 면 소재지까지 길어야 4㎞ 구간입니다. 그야말로 산책 삼아 걷기 좋습니다. 중간에 쉼터가 있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늘이 없어 한여름에 걷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정면으로 악양면을 둘러싼 산세가 더욱 선명합니다. 1000m 수준의 봉우리들이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신성봉(615.3m), 형제봉(1116.2m), 수리봉(873.6m), 거사봉(1133m), 시루봉(992.9m), 칠성봉(905.8m), 구재봉(773.6m), 분기봉(627.8m)까지 고개를 180도로 돌려야 이어지는 파노라마입니다. 문득 5년 전 히말라야 산 속을 돌아다닐 때 만난 아득한 풍경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곳에도 우뚝한 봉우리들이 산그리매를 만들고 있습니다. 산그리매를 이룬 봉우리는 전남 광양의 백운산(1222.1m) 자락이겠습니다.

제방길에서 보니 악양 풍경이 색다릅니다. 보는 각도가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제법 신선합니다. 눈앞에서 풍경을 가로지르는 제방길 자체가 주는 역동성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또, 마을에서 들판을 바라보다가 들판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게 되는 일도 즐겁습니다. 들판과 산등성이가 풍경을 위아래로 나눈 것이나 반듯하고 질서정연한 논과 산등성이 자연스러운 곡선의 대비도 느낌이 좋습니다. 들판엔 트랙터와 콤바인, 경운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추수가 거의 끝나 커다란 마시멜로처럼 생긴 곤포 사일리지가 곳곳에 쌓여 있네요. 악양 들판에서 나온 볏짚이 가축에게 먹일 사료로 발효되고 있을 저 하얀 비닐(곤포)도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오른쪽으로 악양천 물길 너머 칠성봉, 구재봉 자락에도 제법 많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 악양천 제방길에서 본 풍경./이서후 기자

◇상류로 갈수록 더해지는 매력 = 걷다 보니 지리산둘레길 표지판과 토지길 표지판을 만납니다. 악양천 제방길은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대축∼원부춘 구간에 속합니다. 하동군 악양면 대축리 대축마을에서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원부춘마을까지 이어지는데, 길 초입에 제방길이 있습니다.

제방길은 또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1코스의 일부입니다.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시작해 정서리 화사별서(조씨고가)를 보고 다시 돌아 나와 취간림에서부터 제방길을 따라 가다 들판을 가로질러 동정호까지 이어집니다.

제방길 양쪽으로 조금은 이국적인 식물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악양면이 2019년 3월부터 제방 2.6㎞ 구간에 심은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핑크뮬리, 리틀키튼, 멜리니스사바나, 바늘꽃입니다. 요즘 핑크뮬리로 대표되는 외래종 식물을 너무 많이 심어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각각 아시아, 미국, 아프리카가 원산지이면서도 비슷한 느낌의 식물들이 긴 제방을 따라 늘어서니 그것 자체도 꽤 독특한 풍경이 됩니다. 이런 제방길의 매력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습니다. 악양면에 사무실을 둔 '놀루와'라는 여행사입니다. 일종의 주민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곳인데, 농촌을 배경으로 주민가이드가 진행하는 여행과 문화기획 사업을 합니다. 놀루와에서 2019년 10월 '평사리 들판 슬로 워크(SLOW WALK)'란 이름으로 제방길과 악양 들판 걷기 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만들어 둔 것일까요, 제방길에 '그대와 같이 걷는 이 가을, 너무나 완벽해요' 식의 뭔가 감상적인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몇 개 있어 눈길을 끕니다.

▲ 악양천 제방길을 걷는 주민./이서후 기자 <br /><br />
▲ 악양천 제방길을 걷는 주민./이서후 기자

축지교를 지나면 제방은 악양천을 따라 한층 북쪽으로 꺾입니다. 서서히 악양 들판의 끝자락입니다. 악양천 물길도 제법 아기자기해집니다. 이곳 악양천은 제법 수량이 많아 보입니다. 수면에 가을 하늘이 있는 그대로 담겼는지 물빛도 정말 새파랗습니다. 하천으로 바짝 내려간 다리를 건너다보니 물속으로 물고기들이 새까맣게 몰려다닙니다. 상류로 갈수록 계단식 논이 늘어납니다. 그렇다고 이게 너른 악양 들판과 비교해 궁색해 보이지도 않고요. 악양 특유의 풍성한 느낌도 그대로, 조금은 소박한 시골 느낌이 더해졌다고 할까요. 조금 더 걸으면 하천 주변 풍경이 산골 마을로 바뀝니다. 여기는 벼 대신 대봉감을 키우는 농지도 꽤 많네요. 악양천에는 조금 이른 듯한 청둥오리들이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쉬고 있습니다. 아름드리나무 숲 속 만수당이란 경로당을 지나면 로터리가 나오고 곧 면 소재지입니다. 여유를 부리며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네요. 기분 좋은 산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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