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 원천이 된 바다·고향 풍경들
실제 장소와 시구 비교하며 음미

올해 나온 시집 중에 경남 지역 바다를 담은 게 몇 권 있다. 지난 5년 여행 기사를 쓰며 숱하게 해안을 돌아다녔다. 이런 경험에 상상력을 조금 보태니 문자로 이뤄진 시들이 그대로 풍경이 되는 것 같다. 때로는 참지 못하고 지난 여행 때 찍은 사진을 들춰보기도 했다. 어딜 마음 놓고 돌아다니기 쉽지 않은 요즘이기에 시집에서 꺼낸 글자로 된 풍경 몇 장면을 소개한다.

◇바다가 쓴 시들

고두현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민음사, 2020)에는 남해 섬 풍경이 가득하다. 언론인이기도 한 고두현 시인은 남해가 고향이다. 그에게는 남해가 시 그 자체다.

"남해는 저의 고향이자 문학적 모성의 원천입니다. 등단작 '남해 가는 길 - 유배시첩'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이 이곳에서 탄생했지요. 그런 점에서 남해는 시의 섬이자 그리움의 섬입니다. 남해 노을을 꽃 노을이라고 하고, 남해 바다를 꽃 바다라 하며, 남해 물빛을 꽃빛이라고 합니다. '한 점 꽃 같은' 이 섬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가 '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했듯이 '남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표현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시인의 말 중에서)

이 시집은 그동안 그가 낸 <늦게 온 소포>(민음사, 2000년),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민음사 2005년, 2017년 재출간), <달의 뒷면을 보다>(민음사, 2015년)에서 남해와 관련된 시가 담겼다.

물미해안에 대한 시가 제일 처음이라 반갑다. 남해군 삼동면 독일마을 앞에서 미조면 미조항까지 이어지는 도로인데, 개인적으로 남해 섬 최고 드라이브 코스라 생각한다.

▲ 노을 진 남해 바다.
▲ 노을 진 남해 바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 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 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 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척이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전문)

시집에서 묘사한 자연 풍경도 좋지만, 시인이 써내려간 삶의 풍경도 애잔하면서 아름답다. 예컨대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한 장면을 담은 다음 시를 보자.

"어머니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아버지의 빈 밥상' 중에서)

◇나를 사랑하는 시간

이금숙 시집 <그리운 것에는 이유가 있다>(작가마을, 2020년)에는 거제 풍경이 그려졌다. 거제에서 나서 계속 살아온 시인으로, 그 역시 언론인이다. 이번 시집 자체는 예순을 넘기며 든 삶에 대한 감회가 중심 내용이지만, 삶의 터전인 거제 바다 이야기가 빠질 순 없다. 섬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으레 바다는 애증의 대상이 된다. 그 너머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날은 꿈을 꾼다/ 떠나고 싶은 섬이어서/ 대문 밖 모퉁이 그림자로 서 있으면/ 황톳길 먼지 너머 신작로 따라/ 어머님 얼굴 별빛으로 흐르고/ 저녁 밥상 차려 놓은 소녀는/ 오지 않는 식구들을 한없이 기다렸다// 도란거리던 밥상머리/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워/ 겨우 한 끼 밥 차려놓고 기도를 한다/ 추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숟가락의 도를 일러주시고/ 사랑이 밥을 먹는다고 확인해 주셨다// 바람이 부는 날은 바다로 간다/ 그대가 떠난 섬 밖으로/ 바람이고 싶어 다가가 보다가/ 바람이 들려주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바람 속으로 떠난다" ('꿈꾸는 섬' 전문)

이금숙 시인의 시집에도 삶의 애잔한 풍경이 있다. 멀리 고기를 잡으러 나간 아버지를 기다렸던 어린 시절 기억을 적은 시다.

"가덕도가 보이는 방파제 너머/ 아버지의 바다는 봄 멸치 계절/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 따라/ 어부들의 노랫소리 뱃전을 맴돌고/ 포구를 서성이는 갈매기의 날갯짓/ 만선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도// 가덕도가 보이는 방파제 너머/ 아버지의 바다는 빈 그물밭/ 채우려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어린 봄날의 보릿고개 추억/ 생각은 부질없이 물결 따라 흐르고/솟대 위 바람은 그리움 달아/ 사월의 창공에다 은빛을 뿌리고" ('아버지의 바다' 전문)

◇묵묵한 섬이여, 욕심 없는 삶이여

고두현 시인과 이금숙 시인의 시집이 가까이에서 본 바다와 섬사람들의 삶을 그렸다면 이수오 창원대 전 총장의 시집 <다도해>(넓은마루, 2020년)는 한층 멀리 바다를 내다본다. 그러니 바다에 대한 시지만 결국 인간 삶에 대한 것으로 생각이 돌아온다. 시집에는 '다도해'란 제목으로 된 연작시 175수가 실렸다. 시는 대부분 짧고 사뭇 묵직하다.

"하늘이 있어/ 바다가 있는 것인가/ 바다가 있어/ 섬이 있는 것인가// 저 흔들리는 바람/ 저 울려 퍼지는 파도/ 저 아득한 수평선,// 심신이 상쾌해진다/ 영혼이 맑아진다/ 이 섬들이 있어/ 내가 있구나!" (다도해 86)

이 전 총장의 시집에서 지명이 나오는 시는 드문데, 개중에 남해 금산에 대한 게 있다. 통영 미륵산이나 하동 금오산처럼 경남 지역 다도해를 내려다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남해 금산에 올라/ 온다던 그대를 만난다/ 바람과 파도에 곱게 씻긴/ 의젓한 그대,// 잠든 섬들 깨워 별을 보게 하고/ 힘든 일들 하늘의 본분으로 알고/ 유유자적했던 그 많은 세월/ 눈부신 햇살만큼 환하구나/ 고맙네 미안하네 사랑하네" ('다도해 160'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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