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위헌 결정에도 정부는 처벌 고수
낳을 권리도 낳지 않을 권리도 보장해야

한국 사회에서 낙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지난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전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기조였다. 모자보건법에서는 우생학적, 유전학적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성범죄에 의한 임신 등 일부 경우에 한해 24주 이내 낙태를 허용해왔으나, 기본적으로 낙태는 불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낙태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낙태에 대한 논의는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을 고소·고발하면서 본격화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 시술에 위험 부담을 느끼게 됐고, 시술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당연히 시술 비용은 크게 올라갔고, 이는 여성의 건강권 문제로 이어졌다. 2012년 낙태 시술을 한 조산사를 처벌하는 형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소원에 대해 낙태죄 합헌 결정이 내려지는 등 낙태죄는 줄곧 유지돼 왔다.

그러다 지난해 4월 낙태시술을 해 준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의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는 낙태 행위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269조(자기낙태죄)와 형법 270조(동의낙태죄)에 대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위배된다며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관련 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낙태죄는 여성의 건강권, 재생산권 차원의 논의로 전환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임신 14주 이내에만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비판받고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1년이 넘도록 어떤 사회적 논의도 하지 않던 정부가 헌재 결정 취지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여전히 낙태를 죄로 바라보고 처벌하려는 방향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조치를 내놓은 것이어서 너무나 실망스럽다.

낙태 논의는 오랜 기간 지속해 왔음에도 늘 같은 지점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낙태를 선택한 여성 혹은 낙태를 찬성하는 여성에 대해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무책임하다고 보는 시선, 여성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하는 가치로 보는 시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 무차별적인 낙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낙태가 허용된 미국과 독일·벨기에보다 낙태를 금지하는 우리나라의 낙태율이 더 높다는 사실로 이미 합리적인 추론이 아님이 드러난 바 있다.

여전히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답답한 일이지만 여성의 낙태는 한 개인의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을 둘러싼 가족, 경제적 상황, 건강 상태, 양육 능력, 상대 남성과 관계 등 다양한 사회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약과 차별, 불평등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임신한 여성은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여성에게는 혼인관계에서든 그렇지 않든 임신할 권리가 있으며 동시에 임신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여성의 재생산 과정 전체를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보장할 수 없다.

낙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이루어진 지금, 낙태죄를 그대로 둔 채 임신 주수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낙태는 여성 개인의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둘러싼 삶의 조건과 환경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여성이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경과 제도를 보완하는, 보다 근본적이고 생산적인 논의와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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