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박탈감 느끼지 않을 영화, 책방지기 작가 이야기로 풀어
인생이 초라하다는 생각 들 때 은근한 위로와 평온 얻을 수도

우리 책방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다. 중고 가구 거리를 지나 인적이 드문 주택가 골목 안쪽으로 들어오면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가게.

코너 끝자락에 간판도 없는 이곳을 처음 선택하게 된 것은 바로 가게 앞 풍경 때문이었다. 우리 가게 앞에는 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창을 가리는 큰 건물이 없다. 대신 울창한 나무와 골목의 작은 교차로가 있어 거리에는 귀여운 복작거림이 느껴진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딱 이맘때 이 공간을 발견했을 때 가게 앞으로 늘어선 나무들의 색이 아주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붉고 어두운 나뭇잎들이 뒤섞인 교정을 보며 이곳의 풍경은 지난 나의 회사 생활과는 달리 지겹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나는 그 마음에 기대어 이 공간을 선택했다.

종종 손님들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영업을 시작했는지를 물어 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언제 문을 열었더라?', 머릿속으로 지나간 가을의 기억을 되새기고 나서야 겨우 늦은 대답을 한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은 채 살아서일까. 책방 문을 연 지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나 싶다가도 아직 삼 년밖에 지나지 않았나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짧고도 길었던 삼 년의 시간 가운데 가장 좋았던 기억이 많은 계절은 단언컨대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답게 매출이 조금 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까지 늘어난 터일까. 다만 앞으로 내가 이 일을 얼마나 더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계절이, 혹은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나의 인생이란 영화에 하이라이트 장면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가장 꺼내어 보고 싶은 순간이자 그리워할 시간이 되리라는 본능적인 느낌이 든다고 할까.

아마 많은 작은 책방의 주인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책방은 시간을 잊게 만드는 공간이기에 아름답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슬픈 공간이다.

아주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이뤄지는 곳이지만 동시에 언제라도 보석 같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책방이다. 그래서 책방에는 언제나 평범함과 비범함이 공존한다.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를 쓴 저자이자 서울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미화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이미화 작가는 화학을 전공하고 글이 쓰고 싶어 전과를 한 후 베를린으로 떠나 영화와 책을 잇는 영화책방 35㎜를 운영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책과 영화의 조합이라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뭔가를 하고 있지만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나 쉬지 않고 일하는데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아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기분이다. 이 글은 두 발로 딱 버티고 살고 싶어서 쓴 결과물이다. 별 볼일 없고 시시한 매일이 모여 어떤 미래가 될지 두려워질 때마다 붙잡은 현재의 기록이다."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작가의 말' 중에서

▲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이미화 지음.
▲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이미화 지음.

실제 책방 주인의 삶은 녹록지 않다. 삶을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지혜들이 담긴 책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스스로 바라보는 모습은 왜 늘 이렇게 추레한 것만 같은지. 가끔은 이 공간에서의 시간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면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인지 하는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하곤 한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책을 통해서도 위로나 위안을 받지만 영화를 보며 장면과 대사를 통해 그 대답을 찾고자 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던 학창 시절을 지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예술대로의 전과를 택한 후의 이야기,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떠날 때, 정말 원하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떠난 베를린에서 꿈과 현실 차이를 느끼며 좌절했던 순간과 그 이후 돌아와 영화책방을 열기까지.

삶의 방향성을 잃을 때마다 작가는 영화를 통해 어떤 지표를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는 작가의 그런 생각들, 살면서 겪었던 일들과 생각이 맞닿아 있는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27편의 영화를 5개의 챕터로 나눠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소개한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취향이 담긴 영화이지만 나름의 기준에 근거해 선별된 영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사적인 이야기이면서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되는 우리의 보편적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 책에 소개한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에 '영화를 보거나 글을 읽는 사람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만한 영화'여야 한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많은 시간을 스스로의 삶에서조차 주인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내 인생의 서사가 무미건조하고 너무나 평범한 것처럼 느껴질 때면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성공과 해피엔딩이 나를 더 작게 만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이미화 작가가 추천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실패의 경험을 읽다 보면 우리는 '모두의 인생이 특별한 것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혹은 더 나아가 극적으로 꿈을 이루거나 화해하는 결말이 아닌 포기하거나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이 이토록 비슷한 것이라면 나의 삶이라고 특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위안까지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길로 걸어가든 내가 예상했던 목적지로 데려다 주는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숙소만 옮기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타에코가 다시 하마다 민박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2분 뒤에 뭐가 나올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으니 불안하고 의심이 들어도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다. 조금만 참고 가면 기대했든 기대하지 않았든 목적지가 나타날 테니까."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뭐가 나올지는 가봐야만 알 수 있으니까 + [안경]' 중에서

우리 삶의 모양이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는 아닐지라도 저마다 일상에는 잔잔한 파동이 있다. 그 파동 안에서 때로는 기뻐하고 슬퍼했던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감상하는 영화는 러닝타임이 끝나고 반드시 어떤 쪽으로든 결말을 내려준다. 꽉 닫힌 해피 혹은 새드엔딩일 수도 있고 관객의 몫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열린 결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를 보고 일어선 우리는 저마다 해석이 담긴 결말을 가지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우리의 하루, 넓게는 일상에도 반드시 엔딩은 온다. 작가가 소개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실패하고 포기하는 평범한 하루일 수도 있고 이렇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내 인생에도 있구나 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하루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 우리의 삶을 길게 바라보고 아름다운 엔딩을 위해 매 순간을 아름다웠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시간들로 점철하기 위해 오늘도 분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론 스스로가 서툴고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 한 가지는 우리는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생이라는 러닝타임 속 영화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기 원한다면, 누군가의 인생에서 지침이 되었던 영화들이 담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마치 비장의 무기를 손에 쥔 사람처럼, 삶이 다시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명확한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한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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