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활동 벌인 일가친척, 당당한 그 결기 하나같이 닮아
곽 장군 가족 충신·효자·열녀 칭송 뒤 전쟁 참상 고스란히

임진왜란은 조선 팔도를 휩쓴 환란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대지가 모두 젖고, 하늘을 구름이 가리면 아무도 햇볕을 쬘 수가 없듯이 전쟁의 참상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다. 관군과 의병들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일반 백성들은 들판이나 산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는 더욱 심했다.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곳도 경상도였고 물러나 지키면서 다시 침략을 노리는 땅도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1599년)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올린 '기복을 사양하는 세 번째 상소'에는 이런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칼에 찔려 죽기도 하고 배고프고 헐벗어 죽기도 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열에 두셋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망우선생문집>) 장군과 함께 소모관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던 오운도 1600년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함안의 고향 마을 산익이 원래는 호구가 850을 넘었지만 지금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함주지> '발문')

그동안 곽재우 장군의 활약상을 살펴보면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환란을 겪으면서 장군 가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일가 친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벼랑에서 몸을 던진 제수씨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나서 한 달이 갓 지났을 즈음에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장군의 막냇동생인 곽재기의 아내가 왜적에게 해코지를 당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광주 이씨였는데 갓 시집을 왔던 모양으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친정에 어버이를 뵈러 갔다가 난리를 만났다.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따라 산중에 숨었는데 한 달 뒤에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천길 바위로 달려가 아래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현풍곽씨 쌍렬비')

공교롭게 어머니도 현풍 곽씨였는데 곽재기의 아내 이 씨보다 먼저 죽임을 당했다. 같은 산중에 숨었다가 왜적이 붙잡아 데려가려 하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땅에 엎드렸다. 팔을 베고 머리와 얼굴을 가르고 허리와 등을 쪼개도 움직이지 않으니 왜적이 버려두고 갔다. 집안사람들이 가서 구출해 왔으나 14일 지나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모녀가 참상을 당했다.

▲ 현풍곽씨십이정려각(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3) 모두 12칸으로 오른쪽에서 다섯째까지 차례대로 곽준, 곽이상·이후, 곽이상 아내 거창 신씨, 유문호 아내 현풍 곽씨, 곽결·청·형·호 4형제의 정려가, 한 칸 건너뛰어 일곱째가 곽재기 아내 광주 이씨의 정려가 모셔져 있다. /김훤주 기자
▲ 현풍곽씨십이정려각(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3) 모두 12칸으로 오른쪽에서 다섯째까지 차례대로 곽준, 곽이상·이후, 곽이상 아내 거창 신씨, 유문호 아내 현풍 곽씨, 곽결·청·형·호 4형제의 정려가, 한 칸 건너뛰어 일곱째가 곽재기 아내 광주 이씨의 정려가 모셔져 있다. /김훤주 기자

◇당해봐서 잘 안다며 위로하고

<망우선생문집>에는 '아우 재기의 상처를 위로하며'라는 한시가 한 편 있다. 대략 보면 사람이 살아봐야 100살이지만 이조차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 현명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죽었으며 귀한 이도 천한 이도 모두 땅에 묻혔다고 하는 내용이다.

앞에 붙인 짧은 서문도 비슷하다. "살고 죽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유독 자네를 위해 깊이 애도하네. 호랑이에게 다쳐본 사람이 호랑이 무서운 줄을 알 듯이 더욱 자네를 위해 깊이 애도하네. 그래도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이 다칠 수는 없으니 슬픔을 누르고 마음을 풀어라."

이때 장군의 아버지 곽월은 물론 큰형 곽재희와 둘째형 곽재록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셋째인 장군이 집안을 보살피고 돌보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의병을 일으켜 한창 왜적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아무래도 조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시로 적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호랑이' 운운은 장군의 둘째 부인이 세상을 떠난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아우의 상처를 마음 아파하는 모습과는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구석도 있다. 둘째 부인은 초유사 김성일의 참모 이로의 서녀였는데 김석주가 적은 전기를 보면 장군이 요청해서 맞아들였다. 둘째 부인이 합천에 있었는데 목숨이 위독해져서 죽기 전에 장군을 꼭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장군은 "부고를 들을 수는 있어도 가볼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1586년 8월 부친상을 당한 뒤 삼년상 상복을 벗지 않고 있던 1588년 여름이었다. 상주의 상중 바깥나들이는 금기인 시대였다. 이 대목에서 형제는 수족과 같고 아내는 의복과 같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아니면 효가 당시에는 그 무엇보다도 최상의 가치였는지 모를 일이다.

▲ 곽재우 장군의 무덤으로 부인 상산 김씨와 합장했다(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80번지). /김훤주 기자
▲ 곽재우 장군의 무덤으로 부인 상산 김씨와 합장했다(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 180번지). /김훤주 기자

◇종형의 네 아들이 한꺼번에

장군의 집안에서 일어난 참사가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장군의 종질(5촌 조카)들한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장군에게 곽재훈이라는 종형(사촌형)이 있었는데 그 아들 4명이 한날한시에 왜적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비극의 현장은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 144(휴양림길 481) 비슬산 기슭에 있다. 커다란 바위가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마치 동굴처럼 되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여러 사람이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을 사효자굴이라 하게 된 유래는 이렇다. 곽재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각각 결·청·형·호였다. 이 네 아들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아버지를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서 난리를 피하고 있었다. 때마침 왜적이 그 앞을 지날 때 아버지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왜적이 안에 사람이 있는 줄 알아차리게 됐다.

처음에는 맏아들 결이 나가 칼에 맞아 죽었고 다음에 기침이 났을 때는 둘째 청이 대신 나가 죽는 등 셋째 형과 넷째 호까지 차례차레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다섯 번째 기침소리에는 병든 노인이 혼자 나왔다.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자 왜적들도 감동해서 등 뒤에 '네 효자의 아버지'라고 써서 붙이고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했다.

마치 누가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임진왜란 이후 정표를 받은 충신·효자·열녀들을 알리기 위하여 1617년 발간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사자활부(四子活父=네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버지가 왜적에게 잡히자 곽결이 세 아우 청·형·호를 데리고 슬프게 빌어서 아버지는 죽음을 벗어나고 네 아들은 다 죽었다"고 줄거리를 압축해 적었다.

곽재훈은 효자 아들을 둔 아버지로 기림을 받았고 조정에서는 이렇게 목숨을 잃은 네 아들에게 표창을 내렸다. 젊은 네 아들의 목숨으로 늙은 아버지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현실에서 과연 칭송받을 일인지 고개를 갸웃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뜸으로 삼는 덕목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 비슬산 기슭에 있는 사효자굴(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 144). /김훤주 기자
▲ 비슬산 기슭에 있는 사효자굴(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 144). /김훤주 기자

◇황석산성을 지킨 재종숙 곽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적들은 울산 서생포를 출발하여 장군이 지키는 창녕 화왕산성으로 달려들었지만 험준한 지세와 정연한 군세에 덤비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낙동강을 건너더니 초계·합천·삼가·산청을 거쳐 안의에 다다라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육십령을 넘어 곧바로 1차 목적지인 남원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왜적은 굳이 황석산성을 들이쳤다. 곡식도 얻고 후환도 없애기 위해서였다.

당시 황석산성은 함양군수 조종도와 김해부사 백사림, 그리고 장군의 재종숙인 안의현감 곽준이 자기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와 지키고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 곽준과 조종도는 문인 출신이었다. 무장은 백사림 혼자였다. 전란 초기부터 여러 곳에서 무공을 올린 백전노장이기도 해서 성을 지키는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8월 16일 왜적이 성을 비워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고 하자 백사림은 가족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반면 곽준은 장졸을 거느리고 몸소 활을 잡고 대적하면서 부지런히 싸움을 독려하고 왜적을 막았다. 그러나 백사림이 지키던 쪽이 먼저 무너지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졸들과 친척들이 피하라고 권유했지만 "이곳이 내가 죽을 자리"라며 듣지 않았다. 왜적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병장기를 불살라 버린 다음 의자에 가만히 앉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곽준은 전란 초기부터 의병장 김면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을 벌였으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자여찰방을 거쳐 안의현감에 제수됐다. 항렬은 장군보다 높지만 나이는 1551년생으로 한 살밖에 많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산성 수성전은 조정의 방침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흩어져 버렸고 제대로 지킨 데는 장군의 화왕산성과 곽준의 황석산성 두 곳뿐이었다.

◇곽준의 아들·딸, 사위와 며느리도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도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의병 활동을 벌였다. 두 아들은 숨진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다가 목숨을 빼앗겼다. 장남 곽이상의 아내 거창 신 씨도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전사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은 남편 유문호를 따라 성 밖으로 나와 도망쳤다. 그러다 남편이 왜적들에게 사로잡히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편도 붙잡혔으니 내가 살아 무엇하겠느냐?"

이렇게 해서 아버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며느리까지 5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사위 유문호 또한 이후 행적이 기록에 보이지는 않지만 십중팔구 왜적에게 살해됐을 것이다. 왜적들이 조선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일부러 깊은 산골까지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렇게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곽준·곽이상·곽이후의 죽음과 유문호의 아내 곽씨의 자결은 제각각 '곽문충효(郭門忠孝=곽씨 집안의 충성과 효도)'와 '곽씨결항(郭氏結項=곽씨 부인이 목을 매다)'이라는 제목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다. 앞서 얘기한 곽재훈의 네 아들 이야기 '사자활부'까지 더하면 모두 셋이 된다.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곽문충효(곽씨 집안의 충성과 효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린 곽문충효(곽씨 집안의 충성과 효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처럼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충신·효자·열녀의 모범으로 꼽히는 것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가문의 영광'인 것이다. 하지만 살아생전 누리는 복록에 비긴다면 전쟁의 비극으로 얻은 이런 영광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겠는가.

임진왜란 중 왜적과 맞서다 목숨을 잃은 장군의 일가는 더 있다. 종숙 곽간과 곽율이다. 1529년생인 곽간은 초유사 김성일의 막료로 일했다. 1593년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진주 진영에서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죽었다.

그보다 2살 아래인 곽율은 처음에는 의병장 김면과 함께 활동하다가 얼마 안 가 김성일에게 발탁됐다. 이후 초계군수를 맡아 왜적이 낙동강 서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1593년 초계 군중에서 병사했다.

<망우선생문집>에는 장군이 지은 '가을밤 뱃놀이'라는 한시가 있다.

"바람은 가볍고 이슬은 하얗고 달 밝은 가을에

술상은 비록 낭자해도 마음은 저절로 조여오네

형제자매와 여러 손자 조카들을

모두 다 나부끼는 일엽편주에 실었기 때문이네."

시를 지은 시기는 아무래도 전란이 끝난 이후인 것 같다. 일엽편주를 탄 노소 식구들이 강물에 빠질까봐 걱정하는 장군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일엽편주가 떠 있던 망우정 앞 낙동강은 장군이 살아냈던 험난한 시대의 강물이었다.

막냇동생 곽재기의 아내도, 종형 곽재훈의 네 아들도, 재종숙 곽준과 그 아들·딸·사위·며느리도 모두 그 강물 속에 떨어져 빠져 죽었다.

사람들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하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용맹정진하며 거침없이 나아가고 물러났던 위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의병을 일으킨 이후를 보면 단 한 번도 순탄하게 살았던 적이 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안으로 삭여야 했고, 때로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야 했다. 험한 세상에 맞서는 그만의 방식은 당당함이었다. 그 속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를 짐작해보며 새삼 다시 옷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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