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3법 어렵게 국민청원 달성했는데
노동법 개악 뚝딱 처리하려는 국민의힘

밥 아저씨(Robert Norman Ross·1942~1995)는 그림 그리는 내내 '참 쉽죠(That easy)'를 반복했다. 나이프로 선을 긋고 붓으로 쓸어내릴 때마다 드러나는 노을, 설산, 숲, 호수를 보면서 당연히 그림은 쉬운 줄 알았다. '쉬운 그림' 실체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지나서였다. 1996년 여름쯤으로 기억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선배는 장난삼아 붓을 건넸다. 머릿속에서는 노을이 번지는 하늘을 벌써 그렸다. 하지만 물감을 찍은 붓으로 캔버스에 남긴 것은 듬성듬성 흉하게 찍힌 끈적끈적한 자국뿐이었다. 차라리 물감을 붓에 묻히지 않고 그냥 뿌렸으면 더 보기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작 물감을 어느 정도 묽게 만들어 붓에 묻혀야 선을 긋고 칠할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쓸데없는 시도 끝에 붓을 도로 넘기며 속으로 외쳤다. 밥 아저씨, 사기꾼!

그림보다 열다섯 배 자신 있는 당구 얘기로 풀면 이렇다. '키스 없는 평범한 바깥 돌리기' 같은 쉬운 공도 긴 막대기로 공을 겨눠 적당한 회전을 걸어서 정확하게 타격할 줄은 알아야 한다. 세상에 그냥 '참 쉽죠' 같은 것은 없다.

지난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기획을 준비하면서 한 현직 의원 의정활동 기록이 눈에 띄었다. 법안 개정안을 대표발의해서 가결까지 이끈 내용이었다. 대부분 현직 의원 입법 활동이 부진했기에 돋보였고 그 내용이 궁금했다. 확인하니 '당해 연도'라는 말이 어렵고 일본식 표현이라 '해당 연도'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한 명이 입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은 개정안 실적(?)을 한 건 확보했다. 참 쉽죠?

참 쉬울 줄 알았던 법 개정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계기는 입법청원이다. 8월 26일 시작한 '전태일 3법' 국민동의 청원 중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마감 시한을 일주일 남기고 국회 회부 조건인 '30일 이내 10만 명 동의'를 얻었다. 그나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보다는 사흘 빨랐다. 어쨌든 어렵게 청원했으니 쉽게 개정안이 처리되면 다행인데 남은 과정이 지난 과정보다 더 고단해 보인다. 상임위원회는 이 개정안을 어떻게 심사할 것이며 본회의에는 언제 넘어갈까. 세상에 그냥 '참 쉽죠' 같은 것은 없는 줄 이미 알았는데 또 서글프다.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처리를 앞두고 야당인 국민의힘이 느닷없이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묶어 처리하겠다고 나섰다. △노동조합 가입 강요 규제 △노동시간 유연화 △파업 사업장에 근로자 파견 허용 같은 내용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난감해했다. 이 대표는 페이스북에 "야당이 거론하는 노동법 개정은 부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다.

언뜻 스쳐 들어도 노동자 처지에서 꽤 고약하고 악랄한 법이다. '공정경제 3법'으로 재계를 불편하게 한 만큼 달랠 선물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심보가 담긴 듯해 더 괘씸하다. 이런 법은 또 기가 막히게 뚝딱 만든다. 쉬워서 좋겠다! 우리는 너무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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