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속 예와 소통 배우던 옛 추석
편리함만 좇는 현대 사회 씁쓸해

흔히 세월의 체감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체감속도 73㎞면 고속도로에 올려야 할 인생인 셈이다. 새해 일출을 맞이한다고 부산하던 기억들이 바로 어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의 한가운데 와있다. 사방에 풀벌레 소리가 정겹다. 초가지붕에 가녀린 박 줄기가 보름달 닮아가는 박을 달고 힘들어 할 때쯤이면 찾아오던 그때의 추석. 엄마, 몇 밤만 자면 추석인 거야? 하던 먹거리 귀할 때의 그 추석! 벌초 작업하는 예초기 소리에도 추석이 감지되는 이맘때이다.

그때는 그랬다. 기계로 벌초하면 불효라며 낫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어버이들의 생각이었다. 유년시절, 갑자기 많아진 먹거리들을 보고 즐거워하던 그 추석. 지금 아이들에겐 그런 설렘의 추석은 감지되지 않는다.

곱게 정선하여 제수를 만들기 바쁜, 비녀 머리 곱게 한 엄마의 모습도 지금은 보기 드물다. 음식 중에 송편은 추석의 상징이다. 그 모양을 보름달을 닮게 한 뜻이 짐작되는데, 지금은 먹기 편리하게만 만든다. 조상님 음덕과 기른 자의 땀과 기다림이 필요 없는 제수가 제상에 많이 올라와 있다. 그중에 우리네 어버이들을 힘들게 한 생각 없이 차린 수입품도 많이 보인다. 맞춤형 제수도 있다는 지금이다.

그때는 그랬다. 열 촌수까지도 함께하며 한나절 넘게 걸리던 차례였다. 지금은 삼촌도 보기가 어렵다. 불편하다는 이유이고 흉도 되지 않는 오늘이다. 삼촌, 숙모, 당숙, 재종, 고종, 이종, 생질 등의 호칭도 듣기 어렵고 지금은 이 호칭을 이해 못 하는 아이도 많다. 폐교가 되는 초등학교가 해마다 늘어간다. 머지않아 국어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호칭이지 싶다. 보기 싫은 사회, 바로 문제투성이 사회의 모습이 아니더냐?

그때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사랑과 존경심을 길러가고 의무와 도리, 위계질서도 배워갔다. 또한 함께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 이외에 우리도 있다는 걸 알아갔다. 그것은 또한 아이들에겐 바르게 성숙해가는 정서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어른들에겐 요즘 같은 반목의 사회에 꼭 필요한 소통의 자리였고, 아이들에겐 산 교육장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선택의 기준을 가치에 두지 않고 대부분 편리함에 둔다. 그래서인지 부모의 지나친 자녀 사랑과 한편 구식소리 들을까 봐서도 불편함 속에 있는 가치를 알면서도 부모가 직접 해 버리고 아이들에게 일러주지도 않는다. 벌초, 제사, 추석행사 같은 것도 필자의 세대가 마지막이 될 거란다.

그때는 또 그랬다. 상여가 동네를 떠날 때는 모두가 밖에 나와 슬픔을 함께했다. 부모 초상에 묘지 곁을 지키는 시묘살이에서 3년 상으로, 다시 100일에서 49재로, 그리고 잠시 동안 3일 탈상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그도 불편하다 하여 사망 당일 상주복을 벗고 몸도 마음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단다. 바로 얼마 전까지 침식과 고락을 함께하며, 가파른 길을 힘겹게 넘어오며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한 부모가 아니던가?

'온고이지신!' 시공을 넘어선 숱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마음의 양식이 아니더냐? 새겨보는 이맘때가 되었으면 한다. 참 나를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싶다.

편리함이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는 세상! 왠지 씁쓸해진다. 나이 탓일까? 그리고 편리함만을 좇아가는 훗날 그때의 세상, 어떤 세상일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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