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은 편리와 이익으로 인간을 지배해
불편·소박함 속에서 영원 만날 수 있어

우리 모두가 어려운 시절의 사막 혹은 탁류를 건너면서 힘겨워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언제 걱정 없는 날이 있었을까마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절의 어려움과 위험은 유다른 데가 너무 많다.

그냥 저절로 나오는 말이 욕심이 너무 지나쳐서 생긴 어려움이고, 이를 알면서도 그치지 못해 생긴 위험이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더 암담하다.

삶의 어려움과 미래의 위험을 우리 자신의 업보라고 말해 버리기는 너무 쉽다. 그 쉽게 말해버리는 것이 몸에 절어버린 버릇이 되고, 그 버릇이 법과 정의와 공정의 잣대처럼 한쪽으로 기울고, 휘어지고, 진영논리가 되고, 마침내는 모두의 자화상으로 굳어져 간다.

좀 더 본질적인 깊이로 들어가 보자. 4년제 대학 숫자가 수백 개나 되고, 그곳에서 일하고 먹고사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 되며, 국회의원이 300명을 웃돌고, 판사와 검사가 또한 수천 명이며, 행정부라는 공장에서 넥타이 매고 일해서 먹고사는 이른바 철밥통이자 미래가 덜 걱정된다 하여 젊은이들이 목을 매고 있는 화이트칼라도 엄청나게 많다.

대학은 자본에 종속되거나 한 덩어리가 되어야만 운영이 가능하며, 학생들은 자본의 논리에 충실히 복종하여 먹고살 수 있도록 연습시켜, 세상을 향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양심의 목청을 거세해 버리는 짓을 시도하는 곳으로 기울고 있다.

청년은 그저 아직 늙지 않았을 뿐일까? 정치는 왜 밤낮없이 성장만을 외치고, 여론조사의 숫자놀이를 진리강령처럼 여길까? 그리고 늙고 지친 농사꾼들은 왜 밭농사에서 비닐과 농약에 점점 더 의존할까?

전자제품 가격은 무섭게 높아지면서 인간의 손과 머리를 묶어버리고 말하기를, "가만 계시면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결해 드립니다"라고 속삭일까?

이른바 '틈새시장'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시장경제의 원론을 비웃듯이 증가하고, 보험회사가 창궐 수준으로 증가하며, 심심찮게 '장례식장'과 '공원묘지' 광고가 제대로 된 유아교육이나 어린이교육에 관한 것보다 더 많아질까?

제조업 분야에서 점점 전자화되는 기계가 늘어나면서 인간노동의 절벽을 키울까? 단연코 탐욕의 힘이 인간 영혼까지 지배하기 시작한 것일까?

탐욕은 편리와 이익이라는 두 손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편리는 참 기막히게 좋고, 이익 또한 남을 죽여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다.

편리는 이익과 끈이 이어져 있고, 이익은 편리를 내세워서 확장한다. 기계와 기술, 과학과 발전, 성장과 복지도 편리와 이익이라는 괴물의 작품이다.

이쯤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상당한 불편과 소박함, 절약과 검소로 이루어진다는 오래된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불편함 속에서만 영원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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