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선, 제사 지내지 말라 유언…첫째 딸, 10주기 제안
뿌리 깊은 가부장제 그려…가족 관계·여성의 삶 고찰

책방의 중심은 글쓰기 모임과 독서모임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작은 책방을 움직이는 코어 근육과 같은 존재. 독서 모임은 책방을 문자적으로 먹여살리고 살아 숨 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책방에는 3개의 독서 모임과 한 개의 글쓰기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책방 영업과 함께 시작한 독서 모임은 어느덧 햇수로 3년이 됐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몇몇 창립 멤버들은 소위 말하는 '크루'로서 여전히 책방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가장 오래된 독서 모임은 수요일 오전 독서 모임으로, 2주간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읽은 책을 가져와 소개한다. 가끔 마음이 맞으면 한 권의 도서를 지정해 함께 읽기도 하는데, 최근 코로나19로 모두 독서 의욕이 떨어진 터라 오랜만에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 모임의 경우 책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모임 성격에서도 알 수 있듯, 멤버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과 취향은 매우 다른 편이다. 누군가는 고전을 즐겨 읽는 반면, 현대 소설이나 장르 문학을 선호하는 이도 있고 호흡이 긴 책보다 간결한 에세이를 고집하는 멤버도 있다. 이렇듯 한 권의 책을 지정하는 과정은 쉬운 듯 어려운 일이라 합의를 도출하기보다는 룰렛이나 제비뽑기처럼 단순한 방법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엔 어쩐 일인지 모두의 마음을 충족시킬 한 권의 책을 어렵지 않게 선택할 수 있었다. 바로 모임 멤버들 모두 정세랑 작가의 신작 <시선으로부터,>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드라마로 제작된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자이자, SM에서 제작 중인 케이팝 드라마 <일루미네이션>의 각본을 집필하며 활동 반경을 넓혀가는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마치 그 명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출판과 동시에 책방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네서점 에디션으로도 제작됐다.)

책방 손님 중 한 분은 내게 이 책을 가리켜 '제사'를 소재로 하는 책이라고 설명했는데, 정말 재밌었고 좋은 책이니 어서 읽어보라는 뒷말보다 재밌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더 강하게 남아서였을까. 입고만 하고서 읽는 일은 미뤄두다 독서 모임이라는 강제성을 동원해서야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시선으로부터,>는 한국과 미국에 나뉘어 사는 한 가족,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의 가계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 구성원들이 심시선 여사의 단 한 번뿐인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두 하와이로 떠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미술가이자 작가이며, 시대를 앞서 간 여성인 심시선은 평소 제사와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사람이었고, 당연히 자신의 제사 또한 지내지 않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진행자 : 심시선 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심시선 : 그럼요,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봤자 뭐하겠습니까? 사라져야 할 관습입니다.

김행래 : 바깥 물 좀 드셨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전통문화를 그리 우습게 여기고 깔보면 안 돼요.

심시선 :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진행자 : 아, 따님에게요?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심시선 : 셋째요……? 걔? 걔한테 무슨. 나 죽고 나서 모든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김행래 : 몹쓸 언행은 아주 골라서 다 하시는군요.

심시선 :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

책은 시선이 살아생전 남긴 인터뷰와 자서전, 영상과 글을 삽입해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이 어떤 가치관과 신념으로 삶을 꾸려왔는지 직접 보여준다. 그 후 자연스럽게 현재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한 권의 책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읽는 듯한 구조적인 즐거움 또한 느끼게 만들어 준다.

두 번의 결혼으로 만들어낸 시선의 자녀와 손자녀들은 살아생전 그녀의 뜻을 존중하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시선을 닮은 첫째 딸 명혜가 조금 특별한 제사 방식을 제안하면서 작가는 제사라는 소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치 있게 풀어낼 발판을 마련한다.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시선이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내며 각자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을 찾아오는 것, 각자가 찾은 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시선을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큰딸 명혜가 제안한 '제사'의 방식이다. 이렇듯 작가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면서 동시에 다루기 민감한 소재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풀어나간다.

또한 책의 제목처럼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 구성원들은 저마다 심시선의 조각을 품고 반영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겪는 상황을 시선에게 대입하며 엄마라면, 할머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시선을 그리워한다.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십 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의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시선과, 20세기의 막바지를 보낸 시선의 딸 명혜, 명은.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손녀 화수와 우윤이라는 인물 각자에게 부여된 서사를 통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현대 사회의 비극과 부조리한 세상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책 말미에 덧붙여진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는 고백처럼, 소설 속 시선과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여성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의지하며, 때론 위로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시선으로부터,>는 기 센 여자들이 아니라 '기세 좋은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성별과 무관하게 개인이자 사람, 가족 구성원으로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해해 나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소설이다.

<시선으로부터,>를 함께 읽은 수요일 오전. 독서 모임 멤버는 모두 여자였고, 우리는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성별을 떠나 더 좋은 사람들로서 서로 지지하고 연대해 나갈 수 있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다. 책의 취향은 달라도 책에 대한 본질적인 마음이 같은 것처럼, 개성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은 것처럼 말이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심시선'의 삶을 통해 이미 많이 바뀌었으면서 어떤 부분으로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황들도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가 심시선이란 '가지지 못한 과거이자 가지고 갈 미래이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앞으로 우리가 가지게 될 '시선'에 대해 오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조용히 확신해본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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