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버리고 수행하면 괴로움 벗어나
부처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 부처 되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하고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하면 시인(是人)은 행사도(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라고 했다. 참된 부처는 어떤 모양을 통해서 보려 하거나 음성을 통해서 구하려고 하면 이는 사도(邪道)라 했다. 붓다 세존은 32상과 80종호라는 거룩한 금색의 몸매를 갖추었고 붓다의 음성 또한 듣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환희심을 내게 하는 음성이지만 그 모습이나 음성을 통해서 붓다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붓다의 진짜 몸은 색신(色身)이 아닌 법신(法身)이다. 이 법신은 모양도 소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옛날 중국의 동산 양개라는 스님이 어느 해 봄 병이 들었다. 그때 한 제자가 물었다. "스님은 병환이 들었는데 그래도 병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있지." "그러면 그 병들지 않는 사람이 스님을 보고 있습니까?"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네." "스님은 어떻게 그를 보십니까?" "이 늙은 중이 볼 때에는 병이란 아무 곳에도 없네." 이윽고 동산 스님은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을 남긴 뒤 그대로 입망좌탈을 했다.

요즘엔 코로나19로 사람들 마음까지 흉흉해졌다. 거리 두기를 비롯해 접촉을 서로 꺼리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행사를 한다거나 하는 등 크고 작은 모임을 하지 않고 방콕하고 있다. 자연히 민심은 실종되고 코로나19 감염예방 수칙을 준수하느라 스스로 방역 주체가 되어 서로에 대한 방어와 경계심에 사로잡혀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가운데 가장 큰 의문은 생사 문제이다. 왜 인간에게는 생로병사라는 괴로움이 따르는가?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는가? 보통사람들은 이런 의문에 대해 세 가지 길을 선택한다. 신의 섭리로 치부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경우와 누구나 겪는 일인데 고민한들 무엇하겠느냐 되는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자포자기형이다. 붓다는 이렇게 타이르고 있다. 부질없는 집착을 버리고 수행하라. 그리고 바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어떠한 괴로움도 고통도 질병의 마(魔)도 벗어나리라. 그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 답이 아니더냐! 물론 어떠한 종교적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본질은 달라질 수가 있다. 무턱대고 부처의 모습이나 음성에 사로잡혀 부처를 찾기 원하면 절대자는 답하지 않는다. 허상에 사로잡혀 몽(夢)을 꾸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부처 된 삶을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면 성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내몰고 있는 코로나19의 질겁 역시 연기법에 의해서 돌출된 괴질인 병마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언제인가는 이 병마도 곧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 전에 권하고 싶다. 모두 참된 바른 기도와 지혜를 통해서 코로나19를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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