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부터 시를 좋아한 만큼 그 뜻을 알지는 못했다. 마냥 섭섭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냈다. 독해력은 쉬운 영역이 아니지만 나에겐 험로를 걷는 거와 같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무던히도 많은 시일이 소요됐다. 독서와 공부가 부족했던 원인에다 근본적으로 우둔한 탓 때문이다.
공자가 나이 마흔을 불혹지년(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이라 한 뜻을 알아챈 것도 근년이다. '불혹'은 세상일에 '스스로의 관점이 선 것'을 뜻한다고 본다. 예서 '관점'은 무얼 보거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리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뚜렷한 생각과 판단이라 보면 될 것 같다. 관점이 선 사람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처지에 맞춰 입장을 바꿀 수 없기에 미혹되지 않는다. 불혹은 다른 말로 개안(開眼)이라 할 수 있다.
며칠 전 친구 C와 어떤 사안을 두고 토론타가 불거진 '동기가 순수하다'는 말끝에 박남수 시 '새' 한 소절을 비유로써 인용해 주었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매양 쏘는 것은/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을 순수를 잃어버리곤 살아가는 동물로 본다. 누구나 한 번쯤 '비록 지금 상황이 이렇지만 동기는 순수했다'는 변명조의 말은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물들기 쉽고 탈선이 흔한 게 마음이다.
사람 마음은 하얀 옷과 같아 그 순수를 간수하기 힘들다. '인심은 위태롭다'고 한 경전의 말씀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결백하기 어렵다. 어른일수록 순수를 동경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어린이를 천진무구하다 하고 누가 처음 표현했을까. 참으로 놀랍고도 지당한 말이다.
나도 어린 한 시절을 돌이키면 마치 하늘 같은 마음일 때가 있었다. 선악과 미추가 마음에 생겨나지 않았던 것 같다.
순수를 겨냥한 포수처럼 아이들은 또래와 뛰놀면서 파닥이는 새나 곤충 따위 작은 짐승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손으로 막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 손에 획득된 것은 아이가 바란 '순수'가 아니다. 이미 '손상된 걸' 쥔다.
'동기가 순수하다'는 말은 벌써 그가 순수의 언저리에 서 있다는 말이며, 결백을 애써 주장하는 자, 부정을 가리려 쓴 가면무도회의 일원이 아닐까 싶다. 선지자가 '맹세를 말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인간은 포수가 되어 한 마리 상한 새를 항용 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