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비정규직지회 결성, 6개 도급 업체 노동자 843명
고용노동부 "불법파견"에도 회사 블록화·발탁채용 꼼수
2013년 대법원 판결 '전환점' 근로자지위확인 1심 승소도

2005년 이후 계속된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는 까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외치는 이들이 있어서입니다. 배성도(40)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지난해 해고된 배 지회장이 인천 부평공장과 전북 군산공장을 오가며 연대하는 모습도 담습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뭔지 같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라며 8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성도가 떠날 무렵 꿈틀거리기 시작한 이곳은 2005년 전환점을 맞았다. 그해 1월 지엠대우차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우자동차 차별 없는 노동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청노동자 연대투쟁'을 결의했다. 이어 용기 있는 몇 명이 '전국금속노동조합 지엠대우창원비정규직지회'를 결성했다.

지회는 창원고용노동지청에 '불법파견 진정서'를 내며 활동을 본격화했다. 6개 도급(하도급·협력) 업체 843명. 지엠대우에서 작업지시서를 만들고 지엠대우 조장 작업 명령을 받는 이들을 등에 업었다.

그해 4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고용노동부는 2003년 12월~2005년 1월, 2년 이상 근무한 843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두고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다. 얼마나 긴 싸움이 시작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장 다가온 건 절망이었다. 9월 한 협력업체가 폐업하며 86명이 해고됐다. 이듬해 2월에는 단기계약직인 또 한 명이 해고됐다.

노동자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다. 갑자기 터전을 잃은 이들은 공장 안에 천막을 치고 복직투쟁을 했다. 2006년 3월에는 3명이 60m 높이 굴뚝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같은 달 노동부는 파견법 위반 혐의로 닉 라일리 지엠대우 사장과 6개 하청업체 사장을 검찰에 고소했다. 8개월 뒤 검찰은 이들에 대해 벌금 처분을 했다. 지엠대우차 측이 이 처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세계에는 본격적으로 '법'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성도는 칼국숫집에서 칼을 만지고 있었다. 농성이니, 해고니 성도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3년쯤 칼국수를 만들었을 때, 성도는 문득 주말이 있는 삶이 그리워졌다. 옛 직장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어려울 것도 없다고 여겼다. 뭐, 별일 있겠어. 혼잣말을 삼킨 성도에게는 다 쉬워 보였다.

안은 전쟁과도 같았다. 2006년 말 지엠대우는 1년 이상 장기간 근무한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일부 정규직화를 추진했다. '발탁채용'이었다.

고공농성 후 50여 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는데, 200명을 추가로 고용하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발탁채용은 하청업체 사장과 원청 부서장 추천을 받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실상 비정규직 조직화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사이에선 '발탁채용에 희망을 걸자'는 소리가 커졌다.

2007년에는 생산라인 재배치, 이른바 블록화가 이뤄졌다. 장소적 혼재를 없앤다는 명분이었다. 예전, 1직(반) 안에 정규직-비정규직-외국인이 섞여 있었다면 이제는 1~2직은 정규직, 3직은 비정규직으로만 채웠다. 이러면 '합법도급', '완전도급화'로 불릴 수 있었다. 불법이 정당화되는 '꼼수'였다.

▲ 2006년 3월 23일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엠대우 창원공장 사내 굴뚝에 '단기계약 박살'이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 2006년 3월 23일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엠대우 창원공장 사내 굴뚝에 '단기계약 박살'이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다시 한국지엠으로

칼국숫집을 나온 성도는 2008년 아이러니하게도 발탁채용 덕을 봤다. 몇몇 업체는 발탁채용으로 정규직화된 자리를 메우고자 다시 비정규직을 뽑았다.

같은 직에 있었던 형이 '왜 그때 나갔느냐'며 성도에게 핀잔을 줬다. 성도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키 큰 동생이 대신 답했다.

"지금 같으면 안 오는 게 맞죠."

그랬다. 2005년 투쟁이 불러온 블록화는 비정규직 고통을 가중시켰다. 발탁채용으로 정규직이 된 건 극소수. 남은 비정규직은 '합법'이라는 가면에 가려졌다. 정규직과 섞여 일을 할 때는 정규직 조장이나 풀맨이라 불리는 여유 인력이 비정규직 빈자리를 메워주곤 했다. 하지만 블록화 이후 각 협력업체는 인력 여유를 두지 않았고 노동강도는 세졌다.

노조도 와해했다. 애초 투쟁을 주도했던 공장 안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노조 활동보다는 발탁채용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빽', '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돌아다녔고 수백에서 수천이 필요하다는 소문도 나왔지만 여의치 않았다. 지회는 명맥만 유지했다.

2008년 9월 시작된 세계 경기 침체는 비정규직에게 또다른 화살이 됐다. 다마스와 라보를 생산했던 창원공장은 2009년을 휴업으로 열었다. 2주 넘게 지속한 휴업으로 비정규직은 휴업급여 70%와 절반이 삭감된 상여금을 받았다. 비정규직 운동은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2009년 6월 파견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닉 라일리 사장과 6개 하청업체 사장에게 '무죄'가 선고되면서 지회를 향한 관심은 완전히 식었다. 지엠대우가 한국지엠으로 바뀌며 어수선한 분위기는 이어졌지만 모두가 침묵했다. 성도 역시 입을 굳게 닫았다.

2010년 12월은 그래도 달랐다. 창원지방법원 제1형사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불법파견 혐의로 기소된 닉 라일리 전 사장과 하청업체 사장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재판부는 "작업 내용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종합해 보면, 도급을 위한 지시권 한계를 넘었다"고 했다.

2년 뒤 2012년 2월에는 대법원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하청노동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불법파견이 맞다'고 했다. 이 판결은 한국지엠에도 영향을 줬다. 2013년 2월, 대법원은 닉 라일리 전 사장과 하청업체 6개 사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판결에도 한국지엠 측 태도 변화가 없자, 현장에 남았던 조합원 5명은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걸었다. 2013년 6월이었다.

물론 성도와 동료는 판결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법원이 회사에 조치 명령은 안 했지 않느냐', '벌금만 내면 그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회사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발탁채용을 다시 꺼낸 회사는 2013년 전반기 14명, 후반기 80여 명을 정규직화했다. 투쟁이며 소송이며 다 필요 없었다. 그해 12월, 고용노동부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 불법 파견이 없다'는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내놓으며 노조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1년이 덧없게 흘러갔다. 성도는 묵묵히 일만 했고 노조는 외롭게 싸웠다.

◇성도 안의 변화

새 길은 2014년 12월 열렸다. 그달 4일 창원지방법원은 5명이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한국지엠이 비정규직 업무시작·종료·휴게, 연장·야간·휴일근로 여부, 작업속도 등을 결정하고 작업배치권·변경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게 한 근거였다.

무심했던 이들이 '혹시 나도'라고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자 노조원은 50명 가까이 늘었다. 곧 38명이 참여하는 '2차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 시작됐다. 7월에는 정규직화, 계약직 고용보장, 주간·2교대 수당 쟁취를 내건 첫 부분 파업도 있었다. 너도나도 투쟁심이 싹텄다.

"함께 싸우죠.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노조 설명회에서 나온 한마디에 성도는 운동할 때를 떠올렸다. 포기를 몰랐던 그때가 스쳤다. 성도 눈빛이 매서워졌다. 성도는 그렇게 뚜벅뚜벅 이 세계 중심으로 걸어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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