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몸과 마음 다스리는 도교 사상·신선술 가까이
유유자적 기질에 스승 영향 더해 전쟁 때 상처 치유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벽곡찬송은 당대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만큼 특별한 사건이었다. 벼슬살이에 나아가서는 사사롭게 매이지 않도록 해주는 든든한 배경이었고 장군 개인적으로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요즘은 신선을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신선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달랐다.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신망을 얻었던 장군의 벽곡찬송은 그렇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이 행했다는 신기한 행적은 전설이 아닌 사실 차원에서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석주(1634~1684)가 지은 장군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술을 몇 잔 마셨는데 갑자기 그릇을 가져와 귀를 기울이니 귓구멍을 따라 술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의 할아버지 김육(1580~1658)이 조정에서 같이 벼슬을 살던 박수홍(1588~1644)한테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김석주는 '신선인지 아닌지는 종잡을 수 없지만 이인임은 분명하다'고 적었다

다른 하나는 장군이 세상을 떠날 때 광경이다. 여러 곳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광해군일기>는 이렇게 적었다. "어느 날 홀연히 바람과 우레가 그의 방을 감싸더니 재우가 방에 있다가 갑자기 숨졌다. 사람들이 정렬이 감응한 것이라고 했다."

이때 정황은 진주 사람 성여신(1546~1632)의 문집 <부사집>에도 나온다 "진주 서쪽 광탄에 이르렀을 때 바람·소나기·우레·번개가 몰아치다가 바로 개더니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고 자줏빛 기운이 동쪽과 북쪽에 자욱하게 끼었다. 나중에 장군의 부음을 듣고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장군이 세상을 떠나던 시점이었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 문하에서 장군과 함께 공부한 동료였으며 동시에 여섯 살이 많은 선배로서 서로에게 각별한 사이였다.

◇신선술과 인연은 언제부터?

그렇다면 장군이 언제 어떤 계기로 신선술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가 궁금해진다. 1608년 9월 광해군이 벼슬을 내렸을 때 쓴 '부르심을 사양하는 상소'(<망우선생문집>)에 "곡기를 끊은 지가 이미 8년이 지났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1610년에 작성한 '시정의 폐단을 진술하는 상소'(<망우선생문집>)에는 "10년 동안 수양한 공을 버리더라도"라는 표현이 나온다. 시기를 짚어보면 1600년으로 경상좌병사로 있다가 허락받지 않고 마음대로 벼슬을 버렸다는 괘씸죄로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을 살 때였다.

이보다 앞서 1595년 5월 20일 경상감사 서성이 장군에게 보낸 편지(<약봉유고>)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장차 면산에 숨어 적송자를 따르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지팡이와 신발이 이끄는 대로 노닐 생각이 있는데, 어떻게 솔잎탕을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하하."

이런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맞다고 간주하면 장군이 본격적으로 신선술을 행한 시점은 1600년이고 처음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1595년 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장군을 신선의 세계로 접어들게 이끌어준 존재는 김영휘라는 인물이었다. <대동야승>에 실려 있는 '기옹만필'에서 정홍명(1582~1650)이 소개했다. "집이 광주 석보촌에 있었는데 한평생 문을 닫고 수련하는 가법을 매우 좋아했다. 예순이 되지 않아 질환 없이 죽었다." 그러고는 말미에 "장군이 '난리 중에 우연히 김영휘를 만나 신선술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망우선생문집>에는 김영휘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장군에게 드린 시가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장군과 김영휘가 서로 가깝게 지내며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별 도움 안 되는데도 했던 이유는

당시 도교는 이단으로 여겨졌다.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을 꿈꾸는 도교사상이 처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장군은 왜 솔잎을 씹었을까? 장군이 그 내막을 글로 남겼다면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장군은 개인적인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기록을 모아 봤더니 신선술을 시작한 까닭을 세 가지 정도로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는 원래부터 지닌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 만물 어떤 사소한 것과도 인연이 되려면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기운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장군은 1589년 의령 동쪽 기강(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언저리)의 돈지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벼슬 살 생각을 버리고 유유자적한 것이다.

이때 심정은 장군이 쓴 상소문이나 편지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1594년 1월 김덕령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태평시대에 그럭저럭 넉넉하게 노닐려고 했습니다"라고 했고 1600년 '벼슬을 버리는 상소문'에서는 "세상과 끊고 지냈으므로 강가 언덕에 초가집을 지어 꽃과 달을 맞고 물고기를 낚으며 스스로 즐겼습니다"라고 했다.

신선술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갈등이 극심했던 1592년에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대를 풀고 멀리 명산에 들어가 곡기를 끊은 채 학을 부르며 노을을 거느리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도교와 신선술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둘째는 스승인 남명 조식의 영향이다. 장군은 남명 조식이 직접 간택해서 외손녀와 짝이 되게 하고 사위로 삼은 애제자였다. 장군이 열여섯 살 되던 1567년에 남명은 장군에게 <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남명 선생의 문집 <남명집> 연보에도 나오고 배대유가 지은 장군의 전기에도 실려 있다.

남명 조식은 도교의 경전 <장자>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아들여 실천의 방편으로 삼았다. 삼가 토동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뇌룡정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뇌(雷)와 용(龍)은 각각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과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에서 따 왔다. <장자>에 나오는 문구로 '연못처럼 조용히 있다가 우레처럼 소리를 내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나서지 말아야 할 일에는 나서지 말고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나서라는 말이다. 학교 교훈을 <장자>에서 가져온 셈인데 이런 남명에게서 장군이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란으로 심신이 다쳐서

세 번째 이유는 건강 문제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장군이 건강을 다쳤다는 사실은 1594년 1월 일찌감치 확인된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였는데 도원수 권율에게 보낸 보고서(<망우선생문집>)에 나온다. "설 전에 상한병(추위로 생기는 질병)을 거듭 겪고 오른쪽 팔이 마비됐는데 지금까지 차도가 없습니다." 1595년 진주목사로 임명됐을 때는 휴가까지 내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경상감사 서성이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휴가를 낸 지 여러 달인데도 나았다는 기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해 마음으로 걱정됩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1600년 무렵에는 더욱 나빠져 있었다. 2월 경상좌병사를 그만두면서 올린 상소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소 질환이 가래병과 천식인데 울화병도 있습니다. 짙은 가래가 가슴을 메워 밤낮으로 헐떡거리며 토합니다. 울화병은 더욱 심해지고 어지럼증까지 일어나 앞뒤를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장군이 벽곡찬송을 하면서 신선술을 본격 실행하기 직전 모습이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병을 달고 산다. 생로병사는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하물며 모든 것이 열악했던 그 시절에 몸에 병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처지마다 사람마다 몸속에 든 병을 견디고 다스리는 방법이 달랐을 것이고 장군이 선택한 방법은 벽곡찬송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벽곡찬송과 신선술이 실제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을까? 일단 <망우선생문집>에서 이후로 장군이 크게 앓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적어도 건강에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8년이 지난 1608년 9월 14일 자 <광해군일기>에는 장군이 병들어 누워서 방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라고 적혀 있다. 1610년 4월에 올린 '중흥삼책소'에서는 "편두통을 앓고 있는데 더했다 덜했다 하면서 오래 낫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613년 6월 영창대군을 구하는 상소에서는 "나이가 일흔에 가까워지니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또 말년에는 창증(脹症)을 앓았다고 <망우선생문집>에 적혀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명언이다.

◇사헌부에 탄핵도 당하고

신선이 되고 싶다는 소망 안에는 복잡하고 지겨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어 있다. 현실의 고통과 갈등이 그만큼 크고 깊다는 다름 아닌 표현이기도 하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신선에 열광하거나 신선술 쓰는 사람을 경계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장군과 같은 영웅도 일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김수와 갈등이 격심해지자 세상을 등지고 산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 전란 중에는 팔이 마비되거나 추위로 병을 얻어 고생했고, 나이가 쉰이 되어서는 가래병과 천식에 더해 울화병과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화왕산성에서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3년상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세상 인심은 개인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으로 입질을 하고 재단을 한다. 먼저 사헌부가 나서서 탄핵을 했다. 1607년 5월 4일부터 내리 사흘 동안 임금에게 아뢰었다. 많은 선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첫날에는 "선비들 가운데 무뢰한 무리들이 이 사람을 기리는 일도 있고 본받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라 했고 이틀째는 "선비들 가운데 신선술을 배우는 무리들은 이 사람을 영수로 삼고 안팎에 전합니다"라 했으며 사흘째도 "신선술을 하면서 밥을 먹지 않고 괴상하게 행동해 안팎에서 본받는 것이 번창하니 이름은 재상의 반열에 있지만 도류입니다"라 했다. 임금 선조도 처음에는 처벌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막판에 물러서고 말았다.(<선조실록>)

'안팎에서 본받는 영수'라는 사헌부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먼저 한무외(1517~1610)라는 도인이 지었다는 <해동전도록>을 들 수 있다. '스승의 전수 없이 여러 책에 흩어져 나오는 인물' 14명을 적었는데 장군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이를 보면 장군이 생전에 이미 수준 높은 도인으로 꼽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장군 사후 50년 1666년 홍만종이 신선 이야기를 모아 펴낸 <해동이적>에 장군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군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장군의 유묵으로 남겨진 유일한 문장이 바로 도교 서적인 <금단대요>에 나오는 것이다. 호흡 조절에 대한 잠언(조식잠)과 생명을 기르는 데 대한 명언(양생명)도 <망우선생문집>에 남아 있다. <해동전도록>에는 장군이 지은 <복기조식진결>이라는 책이 중요하게 전해 내려온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으며 1857년에 세상에 나온 <주역참동계연설>에는 <양심요결-망우당 비결>이라는 책 내용이 통째 포함돼 있다. 학계에서는 <복기조식진결>과 <양심요결>을 제목이 다르고 내용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날 말 달리며 만 번 죽기로 했던 몸

지금은 할 일 없이 한가한 사람이네.

밥그릇 비어도 양식 없다 걱정 않고

나이 들어 근심 잊고 세상사와 단절했네.

온종일 한가로이 호흡을 고르고

한밤에 홀로 앉아 정신을 수양하네.

구름 타고 학 몰기는 그야말로 어렵지만

심신을 온전히 하여 한평생 살아가리.

 

<망우선생문집>에 있는 시편 가운데 하나다. 말년에 이룩된 장군의 하루 일상이 절로 그려진다. 육체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마음의 고통은 스스로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양식 걱정 하지 않고 한가로이 호흡을 고를 수 있다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가 아닐까.

빼어난 장수였기에 그의 벽곡찬송은 사람들의 입에 더욱 많이 오르내렸고 장군은 그런 벽곡찬송에 힘입어 나아가고 물러나는 처신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벽곡찬송으로 장군이 삶에 평정을 되찾고 매임 없는 자유로움을 구가했다는 사실이다. 이보다 더 귀한 것을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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