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졸업하자마자 IMF 터지고
닭갈비 가게 차렸는데 AI 유행
2004년 지엠대우 창원공장 취업
비정규직 차별 이미 뿌리 내려

10년 넘게 계속되는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는 까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외치는 이들이 있어서입니다. 배성도(40)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의 시선과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지난해 해고된 배 지회장이 인천 부평공장과 전북 군산공장을 오가며 연대하는 모습도 담습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되풀이되는 이유가 뭔지 같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바라며 8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계급과 땀, 눈물과 함성, 열기와 자본으로 이뤄진 이곳. 성도는 2004년 한국지엠 비정규직에 발을 내디뎠다. 이 세계는 성도에게 희망과 좌절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결과만 보면 좌절이요, 출발점에서 그래도 한 발 내디딘, 뒤를 돌아보면 '아직 희망'이다.

4년여 전부터 성도에게 빨간·파란색은 뗄 수 없는 상징색이 됐다. 머리에는 빨간색 띠가, 몸에는 푸른색 조끼가 잘 어울린 그였다. 그 색들을 찾고 나서부터 성도는 주먹을 자주 쥐었다. 주먹 쥔 손을 머리 위로 쭉쭉 뻗었다. 단단한 체구 덕인지 주먹이 유독 굳건해 보였다. 시작은 대열 뒷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어디쯤이었다. 해를 거듭하며 성도는 대열 앞으로 나왔고, 이제 맨 앞에 섰다.

성도는 자신도 모르는 전투력이 있었던 걸까. 돌이켜 보면 그건 아니다. 그저 묵묵하게, 때로는 수줍게 제 할 일만 하며 살았다. 싸움이니, 단결이니, 협상이니 그다지 관심 없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세상은 그런 성도를 바꿨다. 바뀌어야 살 수 있었다. 성도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성도가 태어난 곳은 통영이다. 하지만 2살 때 부모님이 강원도 춘천으로 터를 옮겼다. 고향을 물어볼 때마다 망설이는 이유다. 춘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성도는 중학교 때 합기도를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운동만 했다. 대학 진학도 예체능 계열로 정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다. 성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였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재수를 택했다. 성도는 직감했다. 다시 운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부모님 마음에 부담을 덜고 싶었던 성도는 누나가 있는 청주로 갔다. 처음 몇 달은 공부에만 집중했다. 성도는 얼마 가지 않아 차마 받아들이기 싫었던 현실을 인정했다. 성도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식당 일이 만만치 않은데…."

"체력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성도 눈빛이 마음에 들었는지 칼국숫집 사장은 일자리를 줬다. 석 달간 홀에서 서빙을 하던 성도는 이후 주방으로 들어가 칼국수를 직접 만들었다. 75만 원이었던 월급도 점점 올라 먹고살 만해졌다. 음식점을 한 부모님 덕인지 요식업은 성도에게 딱 맞았다. (합기도) 도복 대신 조리복을 입었지만 성도는 만족스러웠다.

칼국숫집에서 내리 2년을 일하고 나서 성도는 군대에 갔다. 전역하면 지난날 익힌 요리 실력에 부모님 솜씨를 더해 그럴듯한 밥집 하나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난해 12월 23일 한국지엠 창원공장 정문 틈에 팔을 걸친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배성도 씨를 포함한 창원공장 비정규직 585명은 같은 달 31일 자로 해고당했다. 한국 임금노동자 5명 중 2명은 비정규직이다. /경남도민일보 DB
▲ 지난해 12월 23일 한국지엠 창원공장 정문 틈에 팔을 걸친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배성도 씨를 포함한 창원공장 비정규직 585명은 같은 달 31일 자로 해고당했다. 한국 임금노동자 5명 중 2명은 비정규직이다. /경남도민일보 DB

군대 전역 후 성도는 행동으로 옮겼다. 창원에서 닭갈비 가게를 차렸다. 통영·춘천·청주가 아닌, 창원을 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사촌이 있는 동네였고, 통영과 가까워 친숙했다. 도시 소득 수준이 높아 적어도 망하는 일은 없겠다고 여겼다.

닭갈비 가게는 망했다. 실력이 부족해서, 맛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AI)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했다. 다른 나라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 사람 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공포감을 키웠다.

"행님, 그냥 이거 접고, 나 있는 데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조류인플루엔자 앞에 무너진 성도는 아침마다 <교차로>를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 됐다. 한 날 '지엠대우 협력업체 직원 모집'이라고 적힌 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며칠 전 사촌동생이 건넨 말이 겹쳤다. 조류인플루엔자 공포가 언제 끝날지 성도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성도는 닭갈비 가게를 접었다. 도복, 조리복을 거친 성도는 이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단기로 할 겁니까, 장기로 할 겁니까?"

"주야 2교대고, 월 100만 원은 보장해 줍니다. 적성에만 맞으면 이만한 일도 없어요."

쏟아지는 질문에 '예, 예' 몇 번 대답하고 나서 성도는 지엠대우 협력업체 단기 직원이 됐다. 일은 단순했다. 자동차 엔진 한 부분을 조립하는 일이었는데, 3주쯤 지나자 손에 익었다.

그제야 주변을 볼 여유도 생겼다. 성도가 속한 '반(직)'은 보통 10여 명으로 구성됐다. 정규직이라 불리는 사람이 7명, 성도와 비슷한 형태로 취직한 사람이 3명, 외국에서 온 사람이 2명 정도였다. 성도는 그저 같은 일을 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성도는 언제든 떠날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마침 군입대 전 일했던 칼국숫집 사장이 성도 마음을 읽었다. 자동차 엔진 조립을 10개월쯤 했을 무렵이었다. 칼국숫집 사장이 다시 같이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성도를 찾았다. 성도는 망설임 없이 작업복을 벗었다.

그 무렵, 이 세계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98년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시행부터 성도가 떠나기 전까지, 정규직으로 채용된 생산직 직원은 0명.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마다 고용 계약을 하는 현실이 잘못됐음을 하나둘 깨달았다.

10년 동안, 같은 일을 했는데도 정규직과 기본급 차이는 30만 원. 잔업과 특근수당, 각종 수당을 합치면 연봉 차이는 2600만 원까지 벌어진다는 게 부당하다고 외치는 이들이 나왔다.

쓰다 버리기 좋은, 군대 전역 후 복학하기까지 단기로 일하는 대학생이 부쩍 늘어난 상황을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아파도 병원에 제대로 갈 수 없는 현실, 월차 하나 쓰려면 관리자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을 성토하는 이도 늘었다. 월차 등이 근무태도신청서에 좋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 계약 해지를 겁내는 게 과연 맞느냐는 의문도 뒤따랐다. 부평공장에서 온 200여 명을 두고 '신규 채용'이라 주장하는 지엠대우 말이 엉터리라는 비판도 커졌다.

뭐, 성도는 상관없었다. 뭐가 맞고 틀린지 그때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각을 세우기도, 싸우는 것도 싫었다. 성도는 그렇게 창원공장을 등졌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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