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풍류 깃든 개평한옥마을, 100년 넘은 한옥 60여 채 남아
세월 쌓인 삶의 흔적 고스란히, 곳곳 시골생활…마을 운치 더해

함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남쪽에서는 지리산이, 북쪽에서는 덕유산이 줄기를 뻗쳐 감쌌다. 이런 산줄기가 펼쳐놓은 골짜기와 계곡, 그리고 들판 곳곳에 정자와 누각, 서원 같은 유교 문화재가 많다. 김종직, 유호인, 정여창, 박지원 같은 출중한 함양 선비와 그 후손들이 남긴 유교 문화 자산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계서원을 포함해 당주서원, 백연서원, 도곡서원, 구천서원, 용문서원 등 함양 지역 서원들이 선비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곳이라면 안의면 화림동 계곡을 따라 수묵화처럼 자리 잡은 정자들은 함양 선비의 풍류를 상징하는 장소다.

여기에 지곡면 면 소재지 근처 개평한옥마을은 함양 선비들의 생활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함양을 대표하는 선비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고향이다.

▲ 오담고택<br /><br />
▲ 오담고택

정여창은 이황,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조선시대 유학을 크게 발전시킨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린다.

개평한옥마을에는 14세기에 경주 김씨와 하동 정씨가,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마을 주민은 풍천 노씨와 하동 정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에는 지은 지 100여 년이 되는 한옥 60여 채가 남아 있는데, 그 중심은 일두 정여창 생가 자리에 후손들이 지은 일두고택이겠다. 1만여 ㎡(약 3000평) 부지에 사랑채, 행랑채, 안채, 곳간, 별당, 사당 등이 자리 잡았는데, 전형적인 경남 양반 가옥으로 현재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다 보니 KBS 드라마 <토지>(1987년), MBC 드라마 <다모>(2003년), 2019년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 등 지금까지 여러 번 드라마 배경으로 등장했다. 특히 요즘에는 2018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중 고애신의 집으로 유명하다.

▲ 개평한옥마을 풍경
▲ 개평한옥마을 풍경

대문은 사대부 권위를 상징하는 솟을대문인데, 대문 지붕 아래 집안에서 배출한 효자와 충신을 적은 5개 문패가 달렸다. 대문을 지나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인데, 벽에 커다랗게 적힌 '忠孝節義(충효절의)' 한자가 인상적이다. 18세기에 지은 사랑채 말고는 16세기 정도에 지은 것이라 한다. 그동안 여러 번 고쳤겠지만, 그래도 수세기를 이어 살아온 곳이라 생각하면 그 긴 세월을 이어온 삶의 흔적들을 가늠해 보기가 쉽지 않다.

일두고택에서 시작해 안내 지도를 따라 솔송주문화관, 하동정씨 고가, 오담고택, 풍천노씨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저마다 특색 있는 부분을 비교해보는 일도 재밌다.

무엇보다 고택을 오가는 중에 지나는 골목이 정말 정겹다.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옥이 실제 살림집이기도 해서 시골 생활이 그대로 묻어난다. 마당에서 붉게 마르는 고추, 흙담에 기댄 참깨 다발 같은 것들이 그렇다. 여기에 골목에서 만나는 흙담 사이로 뿌리내린 능소화, 수줍게 담 너머로 가지를 넘긴 석류나무 등은 한옥마을의 운치를 한껏 더한다.

참, 마을을 둘러보기 전 일두고택 홍보관에 먼저 들러보자. 이곳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먼저 들으면 고택 산책이 훨씬 풍성해진다.

▲ 일두고택 안내판
▲ 일두고택 안내판

개평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박행달 문화관광해설사 = 함양 개평마을을 처음 방문한다면 먼저 가봐야 할 곳이 '일두 홍보관'이다. 정여창 선생 정보는 물론 문화관광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과 마을지도가 있어 동네여행을 하기 좋다.

단,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싶다면 방문 전 함양군 홈페이지에서 미리 신청해야 한다.

박행달(55) 씨는 지난 2010년부터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함양 역사와 문화, 자연에 대해 초등학교 수준으로 쉽고 재밌게, 편안하게 해설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박 해설사는 시집을 여러 권 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함양군 관광안내지도를 펼치며 "우리 군은 한자 '눈 목(目)' 자의 모양을 띠는데 이 중 개평마을은 심장부에 위치했다"고 설명했다.

▲ 개평한옥마을 골목
▲ 개평한옥마을 골목

TV조선 예능 <시골빵집>과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개평마을이 유명해지면서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다.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등 전·현직 대통령도 방문한 곳이다.

박 해설사는 "도숭산이 품은 개평 한옥마을은 안동이나 전주와 비교하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조선시대 한옥 본연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며 "개인적으로 개평마을 중 좋아하는 곳은 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군락지"라고 말했다.

◇김지인 '지인공간' 대표 =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 맞은편에 있는 '지인공간'은 지난 2018년 9월 문을 열었다. 규모가 꽤 크다. 이곳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금·토·일요일과 공휴일에만 문을 연다. 강연과 학술대회, 공연을 기획·운영하며 북카페와 젊은 창작 국악그룹 '불세출'의 후원회 사무실이 있다.

▲ 오담고택
▲ 오담고택

주인장은 서울 출신으로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는 김지인(50) 씨. 그의 큰 외삼촌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8대 종손이다. 김 대표는 "저희 남매들이 운영하는 출판사 진인진의 지사를 외가 동네에 차려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며 "지인공간 사업자를 별도로 냈지만 진인진과 협업하며 출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인공간은 개평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이 휴식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다. 지역민에게도 고마운 공간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지곡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 업무협약을 통해 취약계층 가구에 직접 만든 빵을 후원하기도 했다. 2년 가까이 북카페를 운영하면서 몸소 느꼈던 개평마을의 매력에 대해 그는 "일두고택을 위시한 아름다운 한옥들과 수려한 산세가 어우러진 유서 깊은 곳"이라며 "자연과 함께 조용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 일두고택 사랑채
▲ 일두고택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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