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재산 털어 의병 모았지만
양식 없어 관아 창고 열었다가 역적 몰려 체포·부대 해산 위기
초유사 김성일 백방 도움 '구제'
왜적 표적 될까 다들 변복할 때 죽음 각오한 장군의 인품 확신

세상에 저 홀로 잘난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공적을 세우기도 하고 누군가의 계략으로 허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공적과 허물은 한몸이어서 좋고 나쁨으로만 규정할 수도 없는지 모른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에게는 김수와 김성일이 그런 인물이었다. 장군이 육적이 될 뻔한 사연과 그런 위험에서 구해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의병을 끌어모으며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왜적이 박두했으니 부모처자는 포로가 될 것이다. 마을에서 싸울 만한 젊은 사람이 몇백은 되니 마음을 같이하여 정암진을 근거로 삼아 지키면 보전할 수 있다. 어찌 손을 묶고 죽음을 기다리겠는가."(<연려실기술>·<기재사초>)

결연한 의지로 왜적을 물리치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어디 그리 생각대로만 이루어지는가! 허를 찌르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장군의 부대를 먼저 찾아온 것은 정작 왜적이 아니고 배고픔이었다.

장군은 먼저 본인의 재산을 풀어 병사들을 먹였다. 다음으로는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형 허언심의 창고를 열어서 해결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군량은 곧바로 떨어졌다. 의령에서 나름 산다는 부자들이 곡식을 내놓지 않았다. 자형인 허언심조차 처음에는 거절했으니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은 어떤 방법으로 식량을 확보했을까? 초유사 김성일의 보고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곽재우의 군사는 양곡이 없어 초계·신반현의 관아 창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 군사들을 먹였습니다."(<난중잡록> 1592. 6. 19.) 또 거름강에 버려져 있던 배에서도 조세로 바쳐진 쌀을 가져 왔다.(<연려실기술>)

◇관군이 내린 곽재우 체포 명령

그러자 합천군수 전현룡이 장군이 육적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마침 같은 초계에서 정대성이라는 사람이 도적질을 한 직후였다. 우병사는 정대성을 붙잡아 목을 베고 곽재우도 마저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장군의 이런 행동을 두고 지금 사람들은 정당하다 할 수도 있고 사리에 맞지 않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의병 활동조차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렇지 않고 군사를 모으면 임금에게 반역한다는 혐의를 살 수 있었다. 곽재우 장군은 그렇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초유사 김성일의 격문을 받고서야 의병을 일으킨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장군이 이런 사정을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왜적 토벌이 급선무이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군사들을 먹여야 했기에 관아에 들어가 곡식을 끌어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미쳤다고 하고 어떤 이는 도적질을 한다고 했다." <난중잡록>(1592. 4. 22.)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정대성이 참수를 당하면서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군사조차 흩어지게 생겼다. 그러자 "곽재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모두 팽개치고 두류산(지리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한강집> '김성일 행장') '말짱 도루묵'이 멀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지 않았던 장군은 군사를 모으는 과정부터가 남달랐다. 당시 의병장으로 나섰던 양반 선비들은 학문이나 가문을 연줄로 삼아 군사를 모았지만 장군은 싸울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책상물림이 아니었고 전투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싸움에서 학문이나 가문 따위가 필요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선조수정실록>(1592. 6. 1.)은 "무인 재질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겁도(=강도)는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며 그런 무리를 찾아 설득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다"고 적었다. <광해군일기>(1617. 4. 27.)는 "악소배 100여 명"이라 했고 <난중잡록>(1592. 4. 22.)은 '심대승·권란·장문장·박필 등'을 특정하면서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이라 했다. 이렇게 구성된 군대가 관아를 들이쳤으니 의심을 받을 측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킬 때 북을 매달아 치면서 군사를 모았다는 나무 현고수다. 줄기 모양이 북을 매달기 좋도록 굽어 있다. 장군의 생가가 있는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김훤주 기자

◇장군을 살린 초유사 김성일

곽재우 의병부대가 사라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때마침 은인이 나타났다. 초유사 김성일이었다. 그는 전라도 남원에서 경계를 넘어 경상도 땅 함양에 들자마자 5월 4일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쓰고는 바로 이어서 장군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함양 의병장 정경운이 쓴 <고대일록>에 나온다. "예순일곱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족하는 민간에서 떨쳐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적선을 섬멸해 의로운 명성이 한 지역에 치솟았다고 하니 선친께 후손다운 후손이 있다고 이를 만합니다." 장군은 "곧바로 편지를 깃대에 매달아 보였다. 고을 사람들은 비로소 곽재우가 의거했음을 믿게 됐고 감사나 수령도 가로막거나 뒤흔들지 못했다."(<한강집>, '김성일 행장')

김성일은 나아가 전직 목사 오운을 군사를 모으는 소모관으로, 자신의 참모 이로를 민간에서 군량을 모으는 사저관으로 삼도록 했다. 삼가 의병도 붙여주고 그 의병장 윤탁도 장군 휘하에 배치했다. 그러자 고을의 부호들도 태도를 바꿔 "날마다 소를 잡고 쌀을 내어 돌아가며 군사들을 먹였다."(<난중잡록>·<용사일기>)

김성일은 장군의 사람됨에 확신이 있었다. 5월 12일 단성에서 두 사람이 만난 자리였다. "곽재우가 전쟁에 나가는 관복을 입고 왔다. 공이 신기하게 여겼는데 말을 해보고는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마침내 서로 죽음으로 약속하고 진주까지 동행했다."(<용사일기>)

서로 마음이 통하는 데는 관복이 한몫했다. 당시는 관복이 왜적의 표적이어서 벼슬아치도 변복을 했다. 장군은 의병장일 뿐인데도 관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김성일은 변복을 비루하게 여겨 관복을 입는 데 더해 나팔·피리로 행차를 알리며 다녔으니 단번에 그 성품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성일은 나중에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한 번 인사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진심이었다.

◇경상감사 김수의 행적은

김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수하에게는 나가 싸우라 했지만 본인은 단 한 번도 왜적과 싸우지 않았다. 왜적이 침략한 4월 14일부터 한 달 동안 전투 현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5월 15일부터는 임금을 모시는 근왕을 명분으로 경상도를 벗어났다. 전라·충청 합동군대에 몸을 붙였는데 6월 5~6일 용인·수원 일대에서 왜적에게 깨졌다. "왜적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자 1만여 군사가 한꺼번에 놀라 무너졌다."(<고대일록> 1592. 6. 15.) 당시 충청감사 윤국형조차 뒷날 "규모와 계획이 몹시 졸렬해 이런 실패를 당했다"(<문소만록>)고 적었을 정도였다.

김수는 근왕군에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다. 거느린 군사가 100명도 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패군한 장수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다."(<고대일록>) "김수 이하가 업신여김을 받아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기재사초>) 이런 천대 속에서도 김수는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김수는 나름 싸우는 장수는 모두 데리고 갔다. 성을 가장 굳건하게 지켰던 거제현령 김준민과 분탕질하던 왜적을 연일 공격해 물리친 함안군수 유숭인, 그리고 작원전투에서 최초로 저항다운 저항을 했던 밀양부사 박진이 대표적이었다. 본인의 신변 보호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경상도 현지 전투력에는 위해가 되는 행위였다.

▲ 곽재우 장군의 전적도 가운데 '의병창의도'다. 문밖으로 왼편 뒤쪽에 현고수가 보인다. '악소배'를 모았다는 실록의 기록이 맞다면 조금 바뀌어야 할 듯도 싶다. /의병박물관
▲ 곽재우 장군의 전적도 가운데 '의병창의도'다. 문밖으로 왼편 뒤쪽에 현고수가 보인다. '악소배'를 모았다는 실록의 기록이 맞다면 조금 바뀌어야 할 듯도 싶다. /의병박물관

◇김수를 죽여야 한다는 곽재우

김수는 6월 15일 돌아왔다. "곽재우는 매우 슬퍼하면서 말했다. '처음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에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왔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난중잡록> 1592. 6. 19.)

이는 김수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장군이 평소 지표로 삼았던 의리에 따른 것이었다. 장군은 전란 초기부터 시종일관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임금이 임명한 장수라면 일단 싸우고 봐야 하는데 처음부터 달아나기만 했으니 역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는 장군의 상소문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자신이 먼저 물러나고 숨어서 온 도의 지키는 장수들로 하여금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어 대적을 맞아들이는 데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상시는 감사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만 위급한데도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감사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가 계신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망우선생문집>) '임금' 또는 '전하' 자리에 국민을 넣고 보면 지금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얘기다.

장군은 김수와 의병들에게 격문을 띄우고 김수는 장군과 의병들에게 격문을 띄웠다. 서로 상대가 역적이라며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하는 치킨게임 양상이었다. 선조 임금이 "김수를 교체할 수도 없고 곽재우를 문책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할 정도였다.(<선조실록> 1592. 8. 7.)

이처럼 심각한 국면에 김성일이 나타났다. 초유사는 감사보다 아래여서 김수가 지시하면 김성일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김성일은 장군을 잡아 가두라는 김수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대신 임금에게는 장군을 옹호하고 현지 상황을 설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김수에게는 편지를 보내 구슬렸다.

장군에게도 편지를 썼다. "감사가 죄가 있어도 조정이 처치하지 도민이 손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큰 공이 이룩되려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지십니까." 장군도 화답했다. "재앙이 닥칠 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천성을 갑자기 고칠 수 없고 울분을 갑자기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셨으므로 합하의 가르침은 바로 임금의 말씀이니 어찌 어기겠습니까."(<난중잡록>)

◇이런 김수가 장군을 편들다니

이토록 참담한 성적표를 들고도 김수의 감사 자리는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초유사에서 경상좌도 감사로 갔던 김성일이 경상우도 감사로 돌아온 8월 19일까지였다. 정작 김수가 떠난 것은 한 달이 지난 9월 21일이었는데 <고대일록>은 "짐 실은 말이 100여 필이고 전라도 운봉으로 향하는 행렬이 20리를 이었다"고 적었다.

이마저도 문책이 아니었다. 임금이 한성부 판윤으로 불러올린 데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사헌부가 탄핵했기 때문인데 장군과 주장이 다르지 않았다. 임금도 마지못해 파직했다. "자신이 먼저 이곳저곳 도망 다니면서 여러 고을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막지 않아 열흘도 안 되어 온 도가 함몰됐습니다."(<선조실록> 1592. 12. 1.)

이런 김수가 그 뒤로 장군을 위하는 발언을 해서 흥미롭다. "대체로 사람됨이 보통은 아닙니다. 젊어서 무예를 닦았고 <장감(=병법책)>을 읽었으며 문장을 짓는 데 통달했습니다. 적을 잡으면 머리나 귀·코를 베지 않고 심장을 구워 먹습니다. 의령·삼가가 온전한 것은 재우의 공입니다."(<선조실록> 1592. 11. 25.) "당초 의병을 일으킬 때는 의심할 단서가 있었지만 스스로 뉘우쳐 모든 군사가 마음으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만일 너그럽게 놓아주고 일을 맡기면 반드시 힘을 다할 것입니다."(<선조실록> 1601. 3. 17.)

시종일관 당당하고 굽힘이 없었던 장군이지만 김성일이 경상우도를 떠나 좌도로 옮겨가게 됐을 때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형세가 이미 순찰사(김수)에게 용납되지 않으니 군사를 해산하고 진영을 파한 뒤 편장·비장이 되어 휘하를 따라가고자 합니다." 김성일은 그렇게 데려갈 수는 없어서 대신 이렇게 말했다. "좌도로 오면 마땅히 현풍·창녕·영산 세 고을의 도의병장으로 삼자고 임금께 아뢸 것이오. 왜적 토벌에 좌우가 있겠소만 그대가 강좌로 오면 강우는 어떻게 되겠소?"(<용사일기>)

김성일은 잇단 상소와 하소연으로 곧바로 경상우도 감사로 옮겨졌다. 우도 의병들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었고 떠도는 유민들에게 소금과 쌀을 배급하는 등 고단한 백성들도 챙겼다. 이듬해 봄에는 백방으로 뛰어서 그토록 얻기 어려운 곡식 1만 석을 확보해 발등의 불을 껐다. 또 왜적의 진주성 공격이 닥쳤다는 첩보에 날마다 힘을 쏟아 전투를 준비했다.

이런 노심초사 때문에 안팎으로 몸이 상하고 역병까지 파고들었다. 4월 19일 앓기 시작하더니 그믐날 진주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곽재우 장군은 생전에는 문병을 갔고 사후에는 곡하는 절차를 마쳤다. 한결같이 편이 되어 주었던 김성일의 면모가 훗날 곽재우 장군을 통해 더욱 선명해지니 이 또한 서로에게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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