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소식지·홍보물 등
고유 한국어 찾기 어려워
정체불명 혼합어도 봇물
사회적 소통 어렵게 해

외래어·혼합어가 넘쳐 나도 이상하지 않은 오늘입니다. 한자어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는 '격세지감'을 느낄 테고, 영어 조기교육을 받은 세대는 쉬운 우리말을 되레 '뉴 월드'라고 표현하겠지요. 청소년은 줄임말을 '국룰'(국민 룰)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글의 역할은 소통입니다. 우리는 소통이 잘 되고 있을까요?

12번으로 나눈 이번 기획은 10대 청소년과 함께 문제를 찾고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 쓰는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입니다. 이 기획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사)국어문화원연합회의 지원으로, 한글학회 경남지회·사단법인 토박이말바라기와 함께합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말을 하고, 말을 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한다. 말과 글로 소통하며 한나라, 한민족임을 확인한다. 우리말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하는 우리 고유의 말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들의 영향으로 중국식 한자와 일본식 한자말, 서구 외래어 다수를 우리말로 사용하고 있다. 한자어와 외래어를 제외한 고유 한국어는 '순우리말'이라고 부른다. 순우리말이 가려진 것과 함께 나타나는 문제는 외래어의 남발이다. '뜰'은 어쩌다 '가든'이 됐을까?

◇'뜰'의 고상한 말 '정원'? = 우리말을 연구한 이들이 엮은 책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고즈윈)에서는 1만여 년 전에 원시 한국어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구촌에는 약 6000개 언어가 쓰이는데 이들 언어가 수만 년 전에는 어느 한 언어였을 것인데, 각 부족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흩어지면서 하나이던 언어가 여러 개로 나뉘어 인류 언어가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정도 다듬어진 한국어가 우리의 단일어로 자리 잡은 것은 원시 한인들이 적어도 정치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를 꼽는다. 중국의 한자는 고조선 말기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걸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서는 "고유명사인 인명과 지명 표기를 음차로 표기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한자가 이 시대의 보편적 언어의 지위를 획득함에 따라 훈차(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로 표기하게 된다. 당시 세계화는 곧 중국화였으니 이 과정에 한문 실력은 입신출세의 간판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식 한자어는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한자 어휘를 말한다. 가출(家出·집 나감), 납부(納付·내다), 절취선(截取線·자르는 선), 역할(役割·구실 또는 할 일) 등이다. 근대 이후 영어와 독일어를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한자어가 주를 이룬다.

또 일본식 한자어는 원래 있던 낱말에 새로운 뜻을 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발명(發明)'은 '죄인이 스스로 결백 등을 밝히다', 즉 '변명(辨明)'이라는 뜻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다'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일본식 한자어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국어로 강요당하면서 일상에 스며들었다. 현재 대부분의 일본식 한자어는 대체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들 상당수가 발음과 표기상 우리말 일부로 정착돼 있다.

"쉬운 말은 귀로 들어서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말로 옮기고 '아름답다'고 쓰며, 보고 '아름답다'란 뜻을 안다. '청각성 = 시각성 = 의미성'이 분리되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된다. 한자 같은 뜻글자는 다르다. '미'라고 발음하고, '美'라고 쓰며,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한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그 글자의 음만 들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아내기가 어렵게 돼 있다. 우리나라의 한자는 그 발음 수가 480개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한 가지 발음에 수많은 한자어가 배정될 수밖에 없어, 동음이의어가 무더기로 나올 수밖에 없다. 듣는 즉시 말뜻을 알아들어야 능률적이지만,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어느 것인가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을 확정할 수 있는 한자어들은 그렇질 못하다. 이 피해를 우리는 그저 버릇이 돼서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참으로 대단한 불편이다." (이창수 2001년 <쉬운 말로 바꿔 쓰기> 논문 중 일부)

'학교 간다, 밥 먹는다' 등 어릴 때부터 입으로 귀로 익힌 우리말은 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등교, 식사'로 바뀌고, 공부를 할수록 더 어려운 다른 한자말이나 다른 나라 말법을 따라간다. '뜰'과 '소젖'은 '정원'과 '우유'보다 격이 떨어지는 말로 인식돼 현재 쓰임이 작아졌다.

◇'정원'보다 세련된 말 '가든'? =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본격화된 세계화는 경제, 문화, 정치 영역에서 양면적인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2003년 '국제 표준'으로 순화), 정보화, 전문화 흐름은 시대에 따라 움직이는 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민영화가 진행되며 2002년 주식회사 케이티앤지(KT&G)로 기업 이름을 변경했다. 초기에는 세계화 바람을 타고 KT&G는 'Korea Tomorrow & Global'을 표어로 홍보했다. 현재 기업의 철학은 'Feel moment, Fill Life'(보다 나은 삶의 완성)이다.

1990∼2000년대 럭키금성은 LG, 백양은 BYC, 쌍용정유는 S-oil, 한국통신은 KT, 포항종합제철은 POSCO로 기업 이름이 세계화 시대에 맞게 영문자로 개명됐다. 패션(fashion), 컴퓨터 게임(computer game), 아르바이트(arbeit) 등 이미 일상을 지배하는 외래어는 다듬은 말이 더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진다. 독일어인 아르바이트는 영어인 파트 타임(part-time)으로 설명된다.

더 큰 문제는 한계를 모르는 지나친 외래어 사용이다. 한글-한자-영어가 온통 뒤섞여 있고 줄임말까지 등장하니 한나라, 한민족이 우리말의 소통 문제를 안고 있다. 정보와 그래픽의 합성어인 '인포그래픽'(infographics)의 순화어로 '정보 그림'이 선정됐음에도 언론과 행정은 인포그래픽을 쓴다. 어르신들의 여름나기를 돕는다는 행정기관의 보도 자료엔 '서큘레이터 보급'이 적혀 있다. '공기 순환기 전달'이라고 하면 시대에 뒤처진다고 느끼는 것일까?

행정기관과 언론에서는 여러 지적에 한자와 영어 사용을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 결과물을 접하는 시민과 독자는 "여전히 어렵고 권위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소젖'은 '밀크'보다 전달이 쉽다. '뜰'은 '가든'보다 우습지 않다. 10대 청소년 시각에서 행정기관 자료와 언론의 우리말 행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 김정대 경남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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