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경상 좌병사 임명했지만 도산왜성 활용책 묵살에 사직
'임금이 왜 침략의 단초'생각에 "허물 통렬히 뉘우치소서" 직언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이후 1617년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삶이었다. 한평생 의리를 지키면서 살았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으니 그를 두고 의리의 사나이라 일컫는 것이 별로 지나치지 않은 까닭이다. 장군에게는 1592년부터 1613년까지 22년 동안 서른 차례가량 벼슬이 내려졌다. 절반 정도는 벼슬을 살러 나갔고 나머지 절반은 나가지 않았다. 임금이 불러 나갔던 15차례도 실은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발길을 돌리거나 부임하자마자 그만두곤 했다. 의리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명분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 자체가 의리를 다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게 장군의 신념이었다. 대표적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넉 달만에 사직한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전란 끝났지만 평화는 아직 멀고 =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왜적을 물리친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 7년 전란이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바다 건너 왜적은 재침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국토는 거덜 났고 백성은 태반이 사라졌음에도 마른행주를 쥐어짜듯 없는 국력을 끌어모아 다시 방비해야 하는 처지였다.

1년 지난 1599년 9월 장군에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임명 유지가 내려왔다. 임금의 편지도 함께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려는 계획이 이미 뚜렷한 형상으로 드러나 어리석은 필부도 틀림없이 올 줄 알고 속을 태우니 오늘날의 근심은 지난번보다 더욱 심하다. 육군을 정비하는 일은 오로지 경에게 달렸으니 진관과 병마와 군기를 십분 정비하여 변란에 대비하라.'

장군으로서는 어머니 3년상을 막 마친 시점이었다. 생모 강씨는 장군이 세 살 때인 1554년에 이미 세상을 떴고 그 뒤 장군을 친아들처럼 돌본 계모 허씨가 있었는데 수성전을 벌이던 창녕 화왕산성 성중에서 1597년 8월 29일 삶을 마쳤다. 장군은 상주가 일상으로 돌아감을 알리는 담제를 서둘러 치르고 좌병영이 있는 울산으로 달려갔다.

▲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의 현재 모습. 곽재우 장군은 당시 여기에 부임해 넉 달가량 머물렀다.
▲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의 현재 모습. 곽재우 장군은 당시 여기에 부임해 넉 달가량 머물렀다.

◇도산왜성을 눈여겨 살펴보니 = 10월 19일 부임해서 살펴보니 상황이 형편없었다. 좌병영 본영 군사 숫자가 모두 4109명인데 모두 장군의 휘하인 것이 아니었다. 976명은 수군 소속이고 820여 명은 수군에 소속시킬 예정이었다. 또 서울로 교대 근무하도록 한 인원이 1370여 명,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作米) 병력이 430명이었다. 나머지 지키는 군사는 고작 489명인데 그나마 4조로 나눠 돌아가니 차례마다 들어가 지키는 숫자는 90~100명 정도뿐이었다.

울산은 왜적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오는 지역이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당시 부산~장기~기장을 거쳐 온 왜군에게 좌병영이 함락됐고, 1597년 1월 정유재란 때는 바다 건너 곧바로 쳐들어온 왜적이 서생포에 자리를 잡았었다. 앞으로 다시 쳐들어온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더욱이 경상좌도 병영성은 하천을 끼고 있는 동쪽은 가파른 언덕이지만 그래도 기본은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었다. 군사가 많아도 조총이 주무기인 왜적을 상대로 해서는 지키기 어려운 형세라는 얘기다. 그런데 마침 바로 가까이 도산에 왜적이 버리고 간 왜성 도산성이 있었다. 산성의 중요함을 알고 일찌감치 수축에 나서기도 했던 장군은 여기에 주목했다.

"도산성을 살펴보니 가등청정이 수만 군중을 부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성을 쌓았는데 견고한 것이 견줄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또 깎아지른 산에 성을 쌓았으니 매우 교묘하여 바로 평지 가운데 생긴 하나의 산성입니다. 외성은 둘레가 600발(1발≒2m) 남짓이어서 정예 2000명이면 넉넉히 지킬 수 있습니다."(<선조실록>1599.12.13.) 도산성에서는 1597~98년 두 차례 전투가 벌어진 적이 있다. 조명연합군이 병력이 절대 우세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가파르고 높은 산성인 데다 석성이 매우 견고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아울러 병사와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경주와 울산은 전란 내내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라 오합지졸이 아닌 정예 병사가 많으므로 다 끌어모으면 2000명을 채울 수 있고 나머지 경상좌도 내륙 군현에서 해마다 쌀을 1인당 20말 남짓 내어놓는 보급 군사 6000명을 모으면 양식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 요체였다.

◇수군제일주의에 가로막힌 육지 수비 = 상식적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은 이 제안은 어떻게 됐을까? 임금은 비변사에 넘겼고 비변사는 이렇게 아뢰었다. "남방을 방비하는 대책은 오직 주사에 달려 있는데 이는 묘당(=비변사=최고 행정기구)에서 이뤄진 결정으로 다시 의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수륙 군병을 조절하는 권한은 순찰사에게 있으니 그리로 넘기자고 했다. 경상좌도 순찰사(한준겸)는 당연히 비변사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 임금과 비변사는 결국 결정권도 없는 사람에게 폭탄 돌리기를 한 셈이다.

이미 이전에 순찰사는 수군에 격군(노 젓는 사람)으로 보내도 모자라는 판에 보급 군사 6000명은 뽑아낼 길이 없다는 얘기를 장군에게 전했다. 배경에는 임금과 조정의 수군제일주의가 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뽑을 때도 수군에 대한 편애를 여지없지 드러냈다. 그러면서 육군의 공적을 두고는 턱없이 과소평가했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수군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느 한쪽만으로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왜적이 순서대로 수군과 싸운 다음 육지로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상륙하면 손쓸 틈도 없이 당할 수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다. 이렇게 결말이 나자 장군은 결연히 사직소를 올렸고 그것이 받아들여지기 전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할 일이 없으면 물러가야 = <망우선생문집>에는 '벼슬을 버리는 상소문(棄官疏)' 전문이 실려 있다. "국경의 성을 지키려 했지만 손을 묶고 앉아 있다가 적이 오면 달아나야 하니 실로 치욕스럽습니다. 지위와 더불어 하는 일 없이 봉급이나 타 먹으며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물러나 무용을 갖춘 장수에게 양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면 바로 물러나야 한다. 그대로 자리에 있으면 하는 일 없이 나라살림을 축내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능력 있는 사람이 일할 기회를 막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임금에게도 요구하고 있다. "만약 변급을 만나면 갑옷 입고 창칼 들기를 청하고 사졸이 되어 창의할 것이며 목숨을 아껴 구차하게 살면서 전하를 배반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한 다음, "신을 어부로 여기셔서 작위로 묶지도 마시고 직분으로 매지도 마시고 강호에서 한가롭게 지내도록 내맡겨 주소서"라고 부탁했다.

사람을 부를 것 같으면 일을 하도록 해주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비끄러매지 말라는 얘기다. 모친상중에 기복(起復=상중에 벼슬살이를 하는 일)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사양하면서 올린 두 번째 상소(1597. 12.)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표현을 하고 있다. "신의 말을 쓰시지 않으면서 신의 몸을 기복하게 하는 것은 신을 쓰시지 않는 것이옵니다."

▲ <해동지도>(부분)에 나오는 좌병영과 도산성. 위쪽 가운데 좌병영이 있고 그 왼쪽 아래는 울산부 관아다. 도산성은 울산부 관아 들머리 오른쪽에 '증성(甑城)이라고 표시된 부분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해동지도>(부분)에 나오는 좌병영과 도산성. 위쪽 가운데 좌병영이 있고 그 왼쪽 아래는 울산부 관아다. 도산성은 울산부 관아 들머리 오른쪽에 '증성(甑城)이라고 표시된 부분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리는 일방 아닌 쌍방통행 = 우리는 보통 군신유의라 하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의리를 떠올린다. 그런데 장군이 생각하는 군신유의는 이런 일반 관념과는 달랐다. 신하가 임금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있듯 임금도 신하에 대해 지켜야 할 의리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세상만사 이치가 그렇듯이 의리 또한 상하 관계를 떠나 쌍방통행이라고 여겼던 독특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군의 이런 생각과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당시 벼슬아치들이 누리는 봉급과 권세는 예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전란이 끝난 직후여서 황폐해진 논밭은 소출이 많지 않았으므로 봉급은 상대적으로 더 중요했다. 사사로운 계산과 욕심이 앞서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을 비웠기에 언제든 떠날 수 있었고 임금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니 병사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었던 장군의 태도와 자세가 좀더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왜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목숨을 내건 병사들, 그런 병사들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장군. 그렇다면 장군이 거두었던 승리는 쌍방통행으로 맺어진 끈끈한 의리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임금이 지켜야 할 의리는 = 장군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는 범상한 선비나 벼슬아치라면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표현이 적지 않다. 누구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지만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소리 없는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크게 반향을 울린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가 정벌한 다음 남들이 정벌한다고 들었습니다. 풍신수길이 비록 매우 강폭해도 우리에게 타고 들어올 틈이 없으면 극도로 흉악하기가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혹시 전하께서 스스로를 정벌하는 단초가 되고 풍신수길이 그를 틈탄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전하께서는 지난 허물을 통렬하게 고치셔서 인심을 수습하소서."(<망우선생문집> '기복을 사양하는 첫 번째 상소')

1597년 9월에 이렇게 상소를 올렸으나 같은 교지가 다시 내려오자 12월에 두 번째 상소를 쓰게 된다. "종묘사직을 생각하시고 백성을 민망히 여기신다면 옛날 허물을 통렬하게 뉘우치시고 지난 생각을 통렬하게 바꾸소서. 나라의 흥망은 중국 군대나 풍신수길에게 매인 것이 아니고 다만 전하에게 달렸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인 1599년 3월의 세 번째 상소는 백성들 생활을 직접 겨냥했다. "창칼에 죽거나 굶어 죽고 얼어 죽어 살아남은 자가 열에 두셋입니다. 기거나 절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와도 먹을 것이 없으니 살고 죽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2~3년은 농사짓도록 놓아두고 침탈하거나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살아나갈 계책이 생길 것입니다." 둔전 마련, 군사 훈련, 군량 비축 등으로 재침 대비가 급선무지만 백성들의 더없이 고단한 저 삶들이 나아지지 않는 한 그조차 사상누각이라는 따끔한 지적이었다.

◇피할 수 없었던 귀양살이 = 장군이 경상좌병사 벼슬을 버리고 떠나자 곧바로 파란이 일었다. 사직소만 달랑 올려놓고는 교체하는 명령이 내리기 전에 임지를 벗어났다는 이유였다. 사간원이 국법을 어겼으니 처벌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의금부가 곤장 100대를 치고 먼 변경에 충군(군역에 넣음)하는 형량이라 아뢰었다. 그리고 마지막 쐐기는 임금 선조가 박았다. "곽재우의 죄는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배지는 전라도 영암이었다.(<선조실록> 1600. 3. 20.)

임금의 마음은 쉬 풀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이 괘씸죄였다. 대신들은 장수가 귀하니 귀양을 풀어 등용하자고 했지만 임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6월 22일 이항복이 여쭈니 "죄인에게 상을 주는 격"이라며 물리쳤다. 이듬해도 2월 19일 비변사가 아뢰니 "기강이 무너지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거절했고 3월 17일 윤근수와 김수가 함께 아뢰었을 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군은 1602년 유배에서 돌아왔다. 곧바로 자연과 더불어 지낼 마음으로 망우정을 짓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랬으면서도 1604년 임금이 찰리사로 부르자 뿌리치지 않고 나아가 인동 천생산성을 쌓았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 선산부사·안동부사·인동현감에 줄줄이 제수됐을 때는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일이면 맡아서 하고 할 수 없거나 하지 말아야 하면 그만둘 뿐이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면서 상대의 지위에 휘둘리지 않고 바른길을 걷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나아가 벼슬하는 것에도,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것에도 매임이 없었던 망우당 곽재우 장군. 장군이 지은 한시 '임금의 부름이 있음(有召命)'을 들여다보며 그의 마음자리를 짐작해 본다.

9년 동안 곡기 끊어 밥 짓는 연기 사라졌는데(九載休糧絶鼎煙)

어찌하여 어명이 하늘에서 내려오나.(如何恩命降從天)

몸이 편안하려니 군신의리 저버릴까 두렵고(安身恐負君臣義)

세상을 구제하려니 신선 되기가 어렵네.(濟世難爲羽化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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