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지는 시기에 시름 달래주던 나리꽃
서양 것들 설쳐대 쓸쓸해진 조선의 풀

굳이 옛날이라 할 것 없이 1950년대 우리 농촌 사람들은 장마라는 말보다 그냥 '마'라고 했다. 장마가 한창이라는 상황을 '마 졌다'라 했다.

이 '마'를 장마라 부른 까닭은 비가 쉬 그치지 않고 한 달 가까이 지치도록 뿌리거나, 내리거나, 쏟아지거나, 퍼붓다가 슬그머니 그친 뒤 불볕이 설치면 온통 습기가 데워져서 시큼하고, 쿰쿰하고, 진득한 곰팡이와 땀띠와 벼룩과 모기가 한바탕 여름 난리를 쳤다.

그래도 모든 집이 흙벽으로 지어지고, 나무와 풀잎으로도 가다듬겨서 이렇다 할 더위와 습기 제거를 위한 기구나 장치 없이 그저 부채 한두 개로 여름을 났다.

그리고 그 '마 지는' 여름철엔 초가집 울타리며 장독대, 밭둑, 산길과 산고개 오르는 풀숲에는 키 큰 참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서 온통 초록의 산과 들에 주황색과 분홍색의 어른 주먹만 한 큼직한 꽃송이가 인간세상 온갖 시름을 달래주며 한 달 가까이 피었다.

꽃송이는 여섯 갈래로 깊이 갈라지고, 꽃잎은 뒤로 젖혀질 듯 활짝 펼쳐지는데, 꽃잎 위에는 주근깨 같은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에서 길쭉한 암술과 수술이 뻗어나와 무더위와 짜증을 다독거려 털어내 준다.

수술 끝에 길쭉하게 달리는 진한 갈색의 꽃가루 덩어리는 강한 인상을 주는데, 유독 호랑나비들이 즐겨 찾아와 그 꽃가루 덩어리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입을 맞추고, 빨고, 비비고, 휘감는 한철이 된다.

참나리꽃 무리에 넘나드는 한낮 호랑나비들의 팔랑거림은 우리 민족의 우아한 춤사위의 스승인 듯 아주 일품이다.

그 무렵이면 참나리 말고도 한정없이 고운 나리꽃들이 참 많이도 피곤 했었다.

잎이 줄기에 동그랗게 돌려 나면 말나리, 잎이 돌려 나면서 꽃이 하늘을 향하고 있으면 하늘말나리, 잎이 돌려 나고 울릉도 같은 섬 지방에 살면서 붉은빛을 띤 노란색 꽃이 달리면 섬말나리가 된다. 잎이 돌려 나면 다 말나리인데, 그 꽃의 방향이나 사는 곳에 따라 접두어가 붙는 것이다.

또한 잎이 서로 어긋나게 달리면서 꽃이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 땅을 보면 땅나리, 하늘과 땅 사이를 보면 중나리다. 잎이 솔잎처럼 가늘고 분홍색이면 솔나리, 흰색 꽃이면 흰솔나리라 불렀다.

2020년 여름, '마'가 아닌 '장마'가 설쳐대는 올여름엔 그 많고, 아름답던 조선의 나리꽃들 자취가 간데 없고, 온통 '백합'이라 부르는 흰 서양꽃들이 설쳐댄다.

그리고 그 나리꽃들 주위에 자라던 조선풀들도 쓸쓸해지고, 어느 먼 타국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가지가 있고 번식력이 섬뜩한 수십 종의 식물이 우리 조선의 꽃과 풀들을 식민지 노예 부리듯 으스대고, 군림하고 있다.

인간도 그리 성해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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