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학관 '내가 뽑은 명시전'
제각각인 선정 이유 보는 재미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중략)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디아스포라 개념으로 잘 알려진 재일조선인 사상가 서경석의 <시의 힘>(현암사, 2015)이란 책에 실린 시의 힘에 대한 문장이다.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란 부제처럼 재일조선인이란 정체성으로 소수자의 고난을 겪어온 그가 굳건히 그 나름의 생각을 키우고 꽃 피워낸 데에 '승산 유무를 뛰어넘은 시의 힘'이 컸다.

경남문학관(관장 서일옥) 상반기 기획전 '내가 뽑은 명시전'에서 문득 서경석의 책이 떠오른 건 도내 문인들이 풀어낸 시의 힘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도내 문인 80명이 각자 시 한 수를 선정했다. 그리고 그 시를 뽑은 이유를 글로 적었다. 단순히 작가라는 간판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문인들의 시 한 수는 그의 인생 자체를 좌우한 것이겠다.

예컨대 책 도둑질을 고백한 이달균 시조시인(경남문인협회 회장)의 글을 보자.

"나의 중학생 시절, 마산 추산동 헌 책방에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중략) 생애 첫 도둑질을 감행하며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자취방에서 밤새워 그 시집을 읽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중략) 한참 뒤 어른이 되어서 백석을 읽으며 윤동주와 백석이 공히 사랑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과 릴케였음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때 나는 알았다. 시인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흠모대상인 누군가의 영감에 의해 탄생한다는 것을."

▲ 경남문학관 상반기 기획전 '내가 뽑은 명시전'을 둘러보는 문인들.  /이서후 기자
▲ 경남문학관 상반기 기획전 '내가 뽑은 명시전'을 둘러보는 문인들. /이서후 기자

지금은 남편이 된 첫사랑의 기억을 담은 배소희 수필가나, 서랍 속에서 고등학생 때 쓴 시 필사본을 발견하고 40년 만에 공개한 천융희 시인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시의 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경석이 말한 시의 힘이 불굴의 지성이나 의지에 작용한 것이라면 이들이 선정한 시는 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깊은 정서로 작용했다.

"첫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이었다. 그 사람이 살며시 내게 건네준 시집 한 권,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이었다. 말이 별로 없었던 그 사람은 시집을 주며 자신의 마음을 전해 주곤 했다. 시집 속에 책갈피를 꽂아 둔 페이지의 시를 읽으며 그의 마음을 알아가던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배소희)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며 펜글씨 수업이 있었던 고2 때의 글씨체다. 글씨본의 가로세로 글을 거쳐 흘림체 경지에 다다른 반 친구들과 각자 한 편의 명시를 쓰기로 했고, 마지막 문장에 감정을 담아 지그시 그해 가을을 물들였던 기억이 난다. 시적 대상에 대해 재미없는 교과서식 해석을 뒤로하고 머지않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은근 건네보면 어떨까 하고 상상했다." (천융희)

서경석은 그의 책에서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는 일본 사이토 미쓰구 시인의 '목숨의 빛줄기가'라는 시를 인용했다.

그저 예쁜 말을 이어서 시를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시 안에 어떤 울림이 없다면 그저 꾸며낸 혓바닥이 뱉어낸 쓰레기일 뿐이다. 경남문학관에 전시된 시 80수에는 저마다 울림이 담겨있다. 문인들이 선정한 이 시들은 직접 경남문학관을 찾아 확인해보자. 문의 경남문학관 055-547-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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