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순환 무급 휴직 연장·구조조정 반대, 생존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들어간 STX조선해양 생산직 노동자 총파업이 지난 23일 끝났습니다. STX조선해양 노사와 경남도, 창원시가 STX조선해양 투자유치 추진·고용 유지 등을 골자로 노사정 상생협약을 체결한 덕분입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 투자유치의 조속한 마무리, 고용 유지 등이 대표적이겠지요. STX조선해양 노동자 생존권이 아직 갈림길에 서 있는 이유입니다.

STX조선해양에 9년째 몸담은 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청춘을 다 바친 회사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그는 볕 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용과 생계, 해고와 가난 사이에서 줄타기 중인 30대 후반 노동자 이야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빌려 3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인력사무소·일당바리·허탕… 
어느덧 나를 둘러싼 단어들

손가락이 가리킨 건 분리수거장이었다. 터벅터벅, 발소리만 있었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스마트폰 라이트에 의지해 밥을 삼켰다. 다 때려치우고 누구라도 들이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스스로 가장 잘 알았다. 돈을 벌어 가족을 보살펴야 했고 그러려면 일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분리수거장이 우리 식당이었다.

이후에는 농기계 부품 공장을 전전했다. 납품하는 부품 중 불량이 발생하면 그걸 접수해 수리하는 일이었다. 그라인더로 갈고 용접하고 칠하면 일당 12만 원을 줬다. 일은 길어야 일주일이었다.

일이 없을 땐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운이 좋으면 건물 철거 현장에서 가스 절단기로 쇠 자르는 일을 했다. 부품 공장, 철거 현장, 인력사무소, 12만 원, 일당바리, 허탕, 형님의 연락. 이 단어들이 내 삶을 말해줬다.

 

8년 전 입사 때 사드린 옷을 
어머니는 낡도록 입고 있다

생활비를 확 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매달 나가는 25만 원 남짓의 어머니 실비보험료와 20만 원 가까운 형 치료비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이너스 통장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신의 실비보험이 쓸데없다고, 건강하니 보험을 해지해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몸 구석구석 상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숨이 턱 막혔다.

8년 전 입사 기념으로 사준, 낡을 대로 낡은 옷을 여전히 입던 어머니. 자식 걱정 덜겠다며, 건강하다고 억지 부리던 어머니 모습에 가슴속 응어리는 커졌다.

지난날 빚을 만들지 않은 건 어쩌면 행운이었다. 한창 잘나가던 2010년 초반, 회사 사람 여럿은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고 차를 샀다. 월급은 많았고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됐기에 다들 무리없이 생활했다. 월급이 반 토막 나고 상환 능력이 안되면서 불화가 생겼다. 불화를 잠재우지 못해 갈라서는 가정이 늘었고 가정을 이루려던 사람은 하나둘 마음을 접었다. '진해와 거제를 포함한 경남 지역에서 개인회생 신청이 2013년 5170건에서 2014년 5562건으로 늘어났다.' 동료가 보여준 몇 해 전 기사는 STX조선해양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줬다.

 

조선소 밖 우리는 벌거숭이 
나이 쉰 넘은 선배는 더했다

조선소는 참 이상한 곳이다. 선배 말을 빌리자면, 조선소 안에서 나는 꽃을 피우는 기술자다. 내 몸뚱어리보다 몇 배는 큰 커다란 쇠를 행여나 어긋날까 잘못될까, 꽃 만지듯 살살 다룬다. 절단기며 용접기며 에어그라인더며 레버블록이며 누군가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기계들을 매일 같이 쓰지만 실수는 없다. 특출난 기술은 없지만 그렇다고 못 하는 일도 없다. 조선소 안에서 나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고 또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밖은 달랐다. 조선소 경력이 몇 년이 됐든, 안에서 뭘 했든 밖에서 나는 별 볼 일 없는 하급 일꾼이었다.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헤맬 때, 조선소에서 몇 년 일했다고 밝히면 돌아오는 눈길은 매한가지였다.

'뭐, 어쩌라고. 그래서 지금 뭐하는데.'

그래도 나는 써 주기라도 했다. 함께 무급휴직을 나갔던, 나이 쉰 안팎인 선배들은 퇴짜 당하기 일쑤였다. 3㎜ 오차가 거의 없게 하고, 가용접을 아무리 깔끔하게 했어도 소용없었다. 조선소 밖 우리는 벌거숭이였다.

 

상생협약으로 넘긴 한고비 
나는 B조 6개월 뒤 복귀다

"그렇게 지난 6개월은 다시 일을 하셨고. 예정대로라면 올해 6월에 500여 명이 전원 복귀해야 했었죠?"

내 얘기를 들으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던 기자가 다시 물었다. 일주일 전인가,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고 엉겁결에 승낙한 게 도청 앞뜰, 이 자리까지 왔다.

기자가 제일 처음 물은 건 내 별명이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나는 대학과 거제, 진해를 들려줬고 기자는 추임새를 넣었다. 앞선 질문에 그렇죠, 라고 짧게 대답하고 나니 기자가 지난 6월 파업 이후 과정을 줄줄 쏟아냈다. 6월 1일 일방적인 무급휴직에 반대하며 515명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가고, 산업은행 창원지점 앞에서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고 창원시청에서 경남도청까지 삼보일배 투쟁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순환 유급휴직 희망이 생겼다가 희망퇴직 문자에 좌절감을 맛보고 도청 앞에서 고함을 내지르던 순간도 떠올랐다. 지회장이 단식 농성에 돌입하고 도지사가 찾아오고, 조합원 총회를 거쳐 상생협약 서명이 이뤄진 날도 있었다.

"상생협약으로 한고비를 넘겼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현장 복귀는 아직 다 안 됐지만."

맞다. 파업 중단 이후 현장에 돌아가는 동료는 절반뿐이었다. 현장 B조였던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여전히 무급휴직 중이다. 6개월 뒤면 A조와 맞바꿔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때쯤이면 모두가 함께 일할 수 있을까. 나로선 쉽게 예단할 수 없다.

그래도 기자 말처럼 한고비 넘겼다. 현장에 복귀하지 않은 우리 B조엔 공공 일자리 사업 참여 제안도 왔다고 한다. 4개월가량 이어지는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적어도 예전처럼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수고는 덜 수 있다.

 

일하는 이도 밖에 있는 이도
여전히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이 투쟁이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건 모든 동료가 다 안다. 수주 물량이 7척밖에 남지 않아, 임금이 제대로 지급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수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회사 정상화는 미뤄질 수밖에 없다. 회사로 돌아간 사람도, 밖에 남은 사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발 뻗고 잘 수 있는 노동자는 아직 없다.

혹 회사를 떠날 생각은 없었냐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옮길 마음은 없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예전, 떠나려는 동료를 앞장서서 잡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떡하느냐는 고민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무급휴직 기간에는 평생을 일당벌이로 살아야 하나, 온종일 곱씹기도 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은 건….

"11시에 기자회견이 있다고 하네요. 농성장 온 김에 가 봐야겠습니다."

"네. 마침 저도 다른 취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기사 쓰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 드릴게요. 제가 조금 귀찮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이번 주는 일도 없는데요. 뭐."

기자가 가고 홀로 우두커니 서서 담배 한 대를 피웠다. 2시간 남짓,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나도 모른다. 기억나는 건 왜 떠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내뱉은 답뿐이었다.

담배 연기에 잠깐 정신을 차렸다. 왜 남았느냐고. 꿈에 그렸던 정규직을 놓치기 싫어서, 4명밖에 남지 않은 동기와 정을 끊지 못해서, 35살이 넘은 나를 누가 받아주겠느냐는 불안감 때문인 건 당연했다. 내 선택에 배신당하기도 싫었다.

한 발 더 나가면, 조선소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내가 있었다. 밖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일꾼에 불과한 사람, 블록을 다룰 때가 가장 안정적인 사람, 회색 유니폼에 벙거지가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다.

결국 조선소여야 했다. 돌고 돌아도 그곳이어야 했다. 다시, 나는 조선소 노동자여야만 했다. <끝>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