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순환 무급 휴직 연장·구조조정 반대, 생존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들어간 STX조선해양 생산직 노동자 총파업이 지난 23일 끝났습니다. STX조선해양 노사와 경남도, 창원시가 STX조선해양 투자유치 추진·고용 유지 등을 골자로 노사정 상생협약을 체결한 덕분입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 투자유치의 조속한 마무리, 고용 유지 등이 대표적이겠지요. STX조선해양 노동자 생존권이 아직 갈림길에 서 있는 이유입니다.

STX조선해양에 9년째 몸담은 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청춘을 다 바친 회사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그는 볕 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용과 생계, 해고와 가난 사이에서 줄타기 중인 30대 후반 노동자 이야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빌려 3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생생한 첫 출근날…특근은 일상

서른, 그 여름은 달랐다.

2011년 8월 나는 정규직 조선소 노동자가 됐다. 지난 경험은 약이 됐다. 2년을 발판 삼아 서류부터 3차 면접까지, 걸림없이 통과했다.

첫 출근 하던 날 주위에는 나와 같은 옷을 받은 45명이 있었다. STX조선해양이 첫 직장인 친구도, 나보다 더 오랜 경력을 가진 형도 있었다.

입사 첫 달은 수습기간이어서 매일 오후 5시에 퇴근했다. 피 끓는 청춘이 퇴근 후 할 일은 뻔했다. 이래저래 짝을 지어 소주방을 드나들었고 조선소 경험담은 세상 좋은 안주가 됐다. '내가 더 힘들었네, 네가 더 빡빡했네' 하는 투닥거림도 있었지만 집에 갈 때쯤이면 어깨동무하고 말했다. 이 좋은 회사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으냐고.

수습기간이 끝나자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STX조선해양으로 옮기며 나도 한 단계 올라섰다. 거제에서 취부를 맡았던 나는 심출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넓게 보면 취부와 심출은 연장선에 있었다. 다만, 심출은 블록을 탑재하기 위해 마킹에서부터 블록 제작, 탑재까지 전 과정에 관여했다. 취부와 용접을 두루 알아야 해 누군가는 심출을 조선소의 진정한 꽃이라 불렀다.

입사 첫해는 미친 듯이 바빴다. 아침 7시에 출근해 체조를 하고 '안전 좋아' 구호를 외치고 나서 8시부터 일을 했다. 심출-취부-용접 작업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일요일도 없었다. 온종일 초대형 블록을 맞추고 붙이다가 퇴근했고 또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 사이에서도 '때려치울까' 하는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불만은 월급날 눈 녹듯 사라졌다. 적어도 월급이 적어서 회사를 그만둔다는 동기는 없었다. 돈맛을 알고 맞은 이듬해 3월 뉴스에서는 'STX조선해양 2011년 연결 기준 매출 약 11조 원, 영업이익 6000억 원 달성, 전년 대비 25% 증가'라는 소식이 나왔다.

▲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월급이 줄었다는 현실은 송곳처럼 내 삶 곳곳을 찔렀다. 나는 조선소 노동자인 내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일터에서 찍은 사진
▲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월급이 줄었다는 현실은 송곳처럼 내 삶 곳곳을 찔렀다. 나는 조선소 노동자인 내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일터에서 찍은 사진

◇입사 2년…회사는 상장 폐지

문득 내게 2년 주기가 있는 건 아닌가, 침울한 생각이 든 건 2013년이다. 물량이 넘쳐 주말에도 일을 시키던 회사는 주말 특근은커녕 연장근무까지 막았다.

그해 여름 문턱, 수주 절벽에 신음하던 회사는 자율협약이라며 은행 돈을 지원받았다. 산업은행이니, MOU니 생소한 단어가 일터를 떠다녔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잔업이 없어지고 임금이 줄더니 이듬해에는 상장 폐지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옆에서 일하던 형은 소리 없이 회사를 떠났고, 대출 이자가 밀려 발을 동동 구르는 동기도 있었다.

법정관리, 빅4의 몰락이라는 암울한 소리는 반복됐다. '정규직 인력 42%가 회사를 떠났다', '2013년 3488명이던 직원이 2100명으로 줄었다', '한 기업이 먹여 살렸던 3000명이 잘려나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을 도배했다. 회사를 유지하는 것보단 없애는 게 낫다는 소문, 영업손실 1100억을 넘겼다는 이야기가 사내 게시판에 돌았다. 소문은 돌고 돌아 2017년 희망퇴직이라는 화살이 됐다.

"예전에 잘나갔잖아 우리."

나는 붙잡는 쪽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다시 일이 넘칠 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임금이 반 토막 난 현실 속에서, 모두가 나처럼 희망적이진 않았다.

"35살 넘으면 어디서 받아주지도 않는다더라."

"그래. 하루라도 일찍 나가서 딴 일 찾아봐야지."

1차 희망퇴직이 끝나자 동기 중 15명이 떠났다. 이어진 2차 희망퇴직, 남은 동기는 한 자릿수 아래였다.

 

◇구조조정 바람…결혼도 물거품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월급이 줄었다는 현실은 송곳처럼 내 삶 곳곳을 찔렀다. 학자금과 의료비가 빠지며 월급 명세서가 얇아진 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기들이 떠나고, 같은 조에서 블록을 맞췄던 성실했던 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래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결혼까지 생각했던 인연이 떠나가고 그를 붙잡지도 못하는 내 처지를 맞닥뜨렸을 때, 나는 조선소 노동자인 내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중견조선사 구조조정 방안'이라는 기사를 본 건 2018년 3월이었다. 고강도 자구 노력과 사업 재편이라는 포장 뒤에 숨은 건 결국 또 구조조정이었다. 내게는 마치 말을 안 들으면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는 협박처럼 다가왔다.

정규직이 된 지 8년째 되던 여름, 나는 시한부 일꾼이 됐다. 구조조정만큼은 막겠다며 파업을 이어가던 노동조합은 2년 순환 무급휴직과 고정비 40% 감축에 합의했다.

법정관리와 맞바꾼 노동자 눈물이었으나, 슬픔을 나눌 시간 따윈 없었다. 현장 복귀 B조에 편성된 나는 곧장 거리에 나왔다. 수소문 끝에 마산 가포에 자리 잡은, 발전소용 열 교환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월급은 200만 원 아래. 물량이 있으면 출근하고 없으면 대기하는 자리였다.

그 무렵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새 환경 적응이나 부쩍 준 월급이 아니었다. ○○이가 빚더미에 올랐다더라, △△행님 갈라섰다더라며 퍼지는 회사 안 소식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됐다. 많이 받아봤자 한 달 180만 원, 수입이 크게 준 동료에게 퀵서비스며 대리운전은 없어서 못하는 일이 됐다. 새벽 2시까지 일하다 쪽잠을 자고 출근해 쇠를 만지다 또 일을 하러 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정을 지킬 수 없었고 버틸 수가 없었다. 희망이 옅어진 것, 그것만큼 삶을 옥죄는 건 없었다.

공사 현장 몇 곳까지 거치고 나서 복직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180만 원으로는 세 가족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기에 주말이면 시멘트와 배관, 목재 일을 했다.

 

◇반복된 무급휴직 버틸 수 있을까

돌아온 두 번째 무급휴직, 6개월 전 갔던 열 교환기 부품 공장에선 일거리가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 했다. 일찌감치 희망퇴직을 하고 나서 농기계 수리업을 하는 형이 길잡이가 돼 줬다. 같은 조에 있었다는 정으로 일거리를 소개해준 형을 따라 고양, 목포, 대구, 진주 등을 뒤지고 다녔다.

울산에 한 달 일거리 생겼다는 형의 연락을 받은 건 10월 중순이었다. 찾아간 공장은 발전기용 냉각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물량팀으로 쓸 겸 나 같은 단기 노동자를 모았다.

함께 울산행을 선택한 회사 동료 8명이 방을 잡고 한 달간 일하기로 했다. 우리 중 절반은 야간 조로 편성됐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주간 조가 됐다. 200이라는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첫날은 모두 야간 조로 일해야 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 저녁으로는 도시락이 나왔다. 식당이 따로 없었기에 도시락을 받은 우리는 휴게실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막 숟가락을 든 순간, 공장 정직원으로 보이는 무리가 다가와 딴 곳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거치적거린다는 거였다. 직원 중 한 명은 아예 저기 가서 먹으라며 집게손가락을 쭉 뻗었다.

손가락을 따라 돌린 시선 그 끝에서 응어리졌던, 애써 외면했던 생각이 비집고 나왔다. 나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됐나. 왜, 하필, 나는 조선소 노동자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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