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순환 무급 휴직 연장·구조조정 반대, 생존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들어간 STX조선해양 생산직 노동자 총파업이 지난 23일 끝났습니다. STX조선해양 노사와 경남도, 창원시가 STX조선해양 투자유치 추진·고용 유지 등을 골자로 노사정 상생협약을 체결한 덕분입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 투자유치의 조속한 마무리, 고용 유지 등이 대표적이겠지요. STX조선해양 노동자 생존권이 아직 갈림길에 서 있는 이유입니다.

STX조선해양에 9년째 몸담은 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청춘을 다 바친 회사를 차마 떠나지 못하는 그는 볕 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용과 생계, 해고와 가난 사이에서 줄타기 중인 30대 후반 노동자 이야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빌려 3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 농성 중 경남도청 앞뜰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 STX조선해양 노동자.  /이창언 기자
▲ 농성 중 경남도청 앞뜰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 STX조선해양 노동자. /이창언 기자

고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살 넘어 안해본 일이 없다

친구들은 나를 '소'라고 불렀다. 소를 닮았거나 소처럼 일을 잘해서는 아니었다. 창원 진해구 웅천에 있는 우리 집은 내가 어릴 적 농사를 지었다. 부모님을 도와 나도 가끔 농사일을 거들곤 했는데, 그때마다 소를 끌고 다녀서 내 별명은 소가 됐다.

삶은 별명을 따라갔다. 나는 소처럼 살았다. 20살 넘어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다. 주유소, 에어컨 부품 공장, 세탁기 부품 공장, 전단 배포 업체, 모델하우스 분양사무실 등을 전전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받은 연락이 어쩌면 시작이었다.

"기형(가명)아, 빨리 가 봐야겠다."

2교시 수업에 들어가기 전, 담임 선생님 말을 듣고 병원으로 향했다. 뇌졸중이었다. 아버지는 차가웠다. 마지막 인사는 듣지 못했다.

좋아하던 게임도, PC방도 끊어야 했다. 남은 건 어머니와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형 그리고 나뿐이었다. 철없이 굴기에는 어머니 주름이 너무 깊었다.

나는 당장 목표를 국립대 진학으로 잡았다. 대학을 졸업해 변변한 직장만 잡으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어머니는 내 속을 들여다보듯, 김치공장에 다니며 뒷받침했다.

"○○대 전기공학과 신입생 이기형입니다."

어림잡아 5년, 5년만 버티자고 다짐했다. 대학만 졸업하면, 드넓은 창원공단에서 나 하나 받아 줄 곳 없겠냐고 속으로 웃었다. 1학기를 마치자마자 나는 대동조선소로 향했다. 아르바이트라도 해 학비를 벌어야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쇠를 만지던 그 여름 내내 나는 생각했다. 대학 가길 정말 잘했다고.

그해 10월 대피하듯 군대로 가 2년여를 보내고 돌아왔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돈은 바닥났고 기댈 곳은 없었다. 선택지는 휴학뿐이었다. 휴학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학교를 다니자,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되뇌었다. 길어야 1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휴학은 몇 번이고 나를 따라다녔다. 휴학-복학을 3차례나 반복하다 겨우겨우 4학년이 됐고 마지막 한 학기만 남겨 두게 되었다. 6개월만 버티면 어엿한 대학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너 진짜 미쳤나. 정신 안 차릴래."

조교 누나가 그토록 차가웠던 적은 없었다. 휴학계를 제출하러 갈 때마다 '고생한다'고 다독여주던 누나였지만 그날은 언성을 높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누나 앞에 있는 서류가 자퇴서였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대학 졸업장을 쥐는 일은 없었다. 그 시기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는 전환점을 맞아야 했다. 몸이 아픈 어머니는 더는 일을 할 수 없었다. 학비는커녕 당장 쓸 생활비가 급해졌고 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친구 선배 모두가 나를 말렸다. 1학기만 더 다니면 되는데 왜 포기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며칠씩 술을 마시며 고민해 봤지만 길은 결국 정해져 있었다. 조교 누나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대학생활 마지막 페이지가 됐다.

학교를 나오고 나서, 나는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 넘게 나오지 않았다.

 

가난 앞에 대학 졸업은 꿈
비빌 곳은 조선소뿐이었다

방에서 나온 나는 소가 됐다. 이제는 정말 소처럼 일해야 했다.

"야 조선소가 그래도 돈은 잘 준다더라."

"아는 행님이 일하는데, 한 달에 500은 번다더라."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나온 말은 다시 조선소였다. 두 번 다신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조선소이나, 기댈 수 있는 건 그곳뿐이었다. 당장 먹고살 돈이, 그것도 큰돈이 필요했다.

2009년 여름, 나는 거제 대우조선해양 기술교육원에 입소했다. 교육생들은 크게 두 가지 기술(과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용접과 선체 조립이었다.

나는 선체 조립, 그러니까 취부를 선택했다. 듣기로 취부는 플라스틱 프라모델(조립식 모형 장난감)을 만드는 것과 비슷했다. 이미 잘린 부재를 들고와서 도면에 맞게 표시된 위치에 놓고 그걸 붙이는 일이었다.

취부를 선택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직업 소개란에는 '3밀리미터(㎜) 정도의 오차만 허용한다', '용접기·용접와이어·절단기·에어그라인더·에어호스·망치·레버블록 등을 모두 다 다룬다'라고 화려하게 적혀 있었지만 나를 움직인 건 누군가 내뱉은 단순한 한마디였다. '취부가 기술이다.'

 

정규직이었으면 하던 그때
STX조선 입사 기회가 왔다

교육원에서는 3개월을 살았다. 교육원을 졸업할 시기가 됐을 때 교육생들은 3지망까지 입사하고 싶은 업체를 적어 냈다. 운 좋게 나는 대우조선해양 1차 벤더에 속하는 업체에 들어가게 됐다.

입사하고 나서 첫 3개월은 최저 시급만 받았다. 매달 시급 100원이 오르는 구조였는데 상여금과 성과급도 꼬박꼬박 나와 처우가 괜찮았다. 회사 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지냈고 일도 익숙해져 갔다. 번 돈 대부분은 집으로 보냈지만 딱히 부족할 건 없었다.

조선소를 꺼렸던, 마음속 응어리도 하나둘 사라져 갔지만 새 욕심도 생겼다. 당시 나는 대우조선해양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일했다. 그들은 나와 달랐다. 그들은 당당하게 월차를 쓰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권리를 외칠 수 있었다. 나도 정규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생각은 자라고 자라, 단단하게 뿌리를 박더니 정규직이 돼야겠다는 나무가 됐다.

"기형아, 니 조선소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2년 다 됐지요. 왜요."

"그럼 조건은 괜찮네. 이거 함 봐라."

어느 날 고향 형이 보여준 사진 한 장은 다시 전환점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내 의사와 상관없었다면 이번에는 선택할 수 있었다.

'STX조선해양 정규직 신입 사원 모집.' 사진 속 글자가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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