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공원 내 합천 3·1독립운동기념탑
독립운동가를 쿠데타 세력이 에워싼 꼴

'지난해 삼월, 서울부터 시작해서 몇 달을 두고 연달아 일어난 3·1만세운동은 도시에서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지역뿐만 아니라 거족적인 양상을 띤 광범위하고 끈덕진 것으로 전개되었는데 경상남도에서는 합천 방면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 그중에서도 합천 방면에서는 무려 여섯 차례나 시위가 있었다. 마지막의 해인사 학교의 생도들과 승려의 시위를 빼놓고 다섯 차례의 시위에선 폭동으로 화하여 사상자도 적지 않게 내었다. 그러니까 3월 23일 합천군 삼가읍에서 체포된 주모자를 탈취하기 위해 만 명이 넘는 군중이 시위에 돌입하고 면소에는 방화, 주재소 우편소를 때려 부쉈는데….'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3부 1권 제1편 '만세 이후'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국가기록원이 2013년 11월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당시 일제에 피살된 645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등재돼 있다. 합천 피살자는 4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합천 독립만세운동은 그 어떤 지역보다 시위 규모가 컸고, 격렬했다. 그 배경은 뭘까?

이 지역 유림의 참여에 주목하는 분석도 있다. 합천은 역사적으로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당한 남인(南人·조선시대 당파 중 하나)들이 주로 거주했다. 이들은 지리·역사적 조건에 따라 토호로서 성격이 굳어졌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유림에게 일제의 무단통치와 변개(바꾸어 고침) 강요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테다. 유림까지 들고일어나니 반일운동이 더욱 거세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변곡점마다 나라를 위해 앞장서 싸우고 희생한 이들은 이름 없는 수많은 민중이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 소설 <토지> 속에 등장하는 짝쇠나 강쇠 같은 민중이야말로 만세운동의 주체였다.

3·1운동 100주년이던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졌다. 합천에서도 독립유공자와 유림회·학생·주민 2000여 명이 만세운동과 총포 사격을 재연하면서 3·1독립운동기념탑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역사적인 모순을 발견한다. 3·1독립운동기념탑이 일해공원 안에 있다는 점이다. 기념탑은 2001년에 세워졌고, 일해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2007년이다.

독립운동가를 쿠데타 세력이 에워싼 형국이다. 부조화 아닌가? 독립운동 정신을 욕보이는 게 아닌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곳이었다. 제 욕심 채우려고 나라를 뺏고 주권자를 살해한 민족반역자 명함이 웬 말인가.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천년생명의 숲'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는 데 망설이는 합천군 위정자나 토호들은 독립운동 때 유림이 아니다. 군민 의견 수렴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뒷짐질 때도 아니다. 독재 부역자들과 뭐가 다른가? 이들이 나서지 않아도 군민이, 도민이 바꾸고야 만다.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올해가 '일해' 흔적을 없앨 최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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