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공신 선정 0순위 본인 안위
정식 선무공신에 곽재우는 빠져
수급 안 베고 기록 안 남긴 장군
정조 이르러 보덕비로 전공 기려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정벌한 1등 공신은 첫째 이순신, 둘째 권율, 셋째 원균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순신과 권율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원균이 왜?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곽재우 장군이 들어가면 맞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전란이 끝난 뒤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았으리라 누구나 짐작하기 마련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명장이었다. 어린아이도 이름을 알았고 대신들도 상면 한 번 해보려고 줄을 지었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이만한 명장이 없다는 취지로 아뢰었으며 임금은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심지어 왜적들도 홍의장군이라 하면 날아다니는 장군이라며 주춤주춤 물러설 정도였다.

장군의 알려진 공적은 오히려 실제에 못 미칠지도 모른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전투를 치렀지만 장군은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장군보다 공적이 뛰어난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한두 차례 전투를 치른 경우가 대부분이고 장군처럼 모든 기간에 걸쳐 활약한 사람은 적었다.

▲ 의령 의병박물관에 있는 의병장 곽재우 동상. /경남도민일보 DB
▲ 의령 의병박물관에 있는 의병장 곽재우 동상. /경남도민일보 DB

◇공신 선정은 전적으로 선조가

공신은 선조가 모두 판단하고 선택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중요한 일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임금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 둘째 명나라에서 군대를 청해 들이는 것, 셋째 의병과 관군을 동원해 왜적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본인의 안위가 0순위였고 의병과 관군은 가장 후순위였다.

공신 명단은 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604년 6월 25일에 결정됐다.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 두 가지였다. 호성공신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몽진하는 임금을 따라다니며 모신 사람들이 대상이었고 선무공신은 몸소 참전하여 싸운 장수뿐 아니라 명나라 군사를 청해 들인 사신들까지 대상이었다.

호성공신에는 1등공신으로 이항복·정곤수가 꼽히는 등 3등까지 모두 86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마부와 내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선무공신은 고작 18명이었다. 1등 이순신·권율·원균, 2등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이었다.

장군은 18명 안에 들지도 못했다. 선무공신이 호성공신에 견줘 4분의1도 안 될 정도로 지나치게 적은 것 또한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신점·정기원·권협·유사원 4명은 중국 군대를 청해 들인 사신이었으니 수군과 육군으로 왜적과 맞서 싸운 장수는 제각각 7명씩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중국 덕분이라는 선조

왜적을 물리친 으뜸 동력은 명나라 군대라는 선조의 그릇된 상황 인식이 작용한 결과였다. 조선 군대, 특히 육군에 대해서는 싸운 것이 없는데 어떻게 상을 주느냐는 투였다. 이런 언급은 <선조실록> 곳곳에 나오는데 1601년 3월 14일 자가 대표적이다. "왜적 평정은 오로지 중국 군대 덕분이었고 우리나라 장수는 중국 군대를 뒤따르거나 요행히 낙오한 왜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다. 일찍이 적병의 수급도 하나 베지 못했고 적진도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1603년 2월 12일 공신도감은 "경상우도의 보전은 실로 곽재우의 힘에 말미암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돌아온 선조의 대답이 대단했다. "우리나라 장사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을 보내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전 승첩이 으뜸이고 권율의 행주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뜻에 찬다. 나머지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쩌다 잘했다 해도 고작 성 하나를 지켰을 뿐이다."

공신도감은 그래도 두 달 뒤인 4월 28일에 곽재우를 포함한 26명의 명단을 다시 올렸다. 임금은 '윤허한다'면서도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였다. "'친구 덕에 공신 된다'는 속담이 있다. 장난으로 한 말이겠지만 어쩌면 멀리 있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일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하라는지 말라는지 헷갈리게 하는 언사였다.

▲ 장군이 최초 승전을 일군 낙동강 기강나루 길가 산기슭에 조정에서 세워준 보덕각. /김훤주 기자
▲ 장군이 최초 승전을 일군 낙동강 기강나루 길가 산기슭에 조정에서 세워준 보덕각. /김훤주 기자

◇당시 신하도 선조에 비판적

이처럼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보다 임금을 모신 사람들을 대놓고 치켜세운 데 대해 지금 사람들은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런데 당시 신하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왜적 정벌에서는 진을 치고 맞서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호종한 신하는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나선 장사들은 소략하게 했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선조실록> 1603. 2. 12.)

10월 29일 공신들을 불러모아 공신녹권과 함께 상급을 주었을 때도 이를 기록한 사신이 <선조실록>에 잘못이라는 의견을 남겼다. 태조가 창업할 때도 개국공신이 30명 정도뿐이었는데 호성공신이 너무 많아 후세에 비웃음거리가 됐다는 요지다. 일을 맡았던 신하는 물론 눈과 귀 역할을 하는 관리(사간원·홍문관처럼 임금이 잘못하면 고치도록 말하는 직임)도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임금이 유일한 절대 주권자였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수위 높은 비판이었다.

사신은 다른 한 가지도 지적했다. 선무공신이 돼야 마땅한 사람들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정인홍·김면·곽재우와 김천일·고경명·조헌을 바로 거명했다. "공훈이 매우 빛나고 뜨거워 충의로운 기개를 드높이고 뒷날 나약한 사람을 충분히 굳세게 할 수 있었다. 이들의 이름을 공훈록에 새겨 후세에 보이면 명분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선무원종1등공신은 푸대접

한 해 뒤 4월 16일 발표된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는 곽재우 장군을 1등으로 포함시켰다. 원종공신은 공신보다 품격이 한결 떨어진다. 앞에 다른 말이 붙지 않은 그냥 공신은 정식 공신이고 원종공신은 준공신 또는 공신 대우로 보면 된다. 게다가 선무원종공신은 1·2·3등 합쳐 무려 9060명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기룡·배설 정도가 장군과 같은 1등이라고 알려져 있다.

원종공신 명단을 결재한 당일 문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조는 "공훈이 미미해도 갚지 않을 수 없어 원종으로 은혜를 베푼다"고 했다. 미미한 공훈의 사례도 구체적으로 꼽았다. "무열을 떨치거나 군대 물품을 돕거나 몽둥이를 들고 치달려 목숨을 바치거나 무기를 들고 적을 쳐서 수급을 베어 바친 것"이었다. 임진왜란 내내 특출한 활동을 펼친 장군이 '수많은 여럿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말았다.

▲ 보덕각 안에는 1785년에 세워진 보덕불망비가 들어 있다. 장군 사후 170년가량 지난 시점이다. 보덕(報德)은 은덕을 갚겠다는 의지이고 불망(不忘)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김훤주 기자
▲ 보덕각 안에는 1785년에 세워진 보덕불망비가 들어 있다. 장군 사후 170년가량 지난 시점이다. 보덕(報德)은 은덕을 갚겠다는 의지이고 불망(不忘)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김훤주 기자

◇갈수록 높아진 장군의 명망

선조의 '중국 군대 덕분론'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잘못이다. 왜적의 최종 목적은 조선을 발판삼아 명나라를 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의 참전은 조선에게 은혜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자국 영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선 땅에서 왜군을 방어한 셈이다. 게다가 전란 중에 부린 행패와 전쟁이 끝나고 저지른 패악질은 또 다른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긁어대는 토색질이 왜적은 얼레빗 같다면 명나라는 참빗 같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의병과 의병장에 대한 선조의 무시도 분명한 잘못이다. 명나라의 도움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한다 해도 조선이 나라를 지켜낸 가장 큰 원동력은 의병과 의병장이었다. 상황을 좌우하는 핵심 동력은 언제나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났다.

장군에 대한 평가는 세상을 떠난 뒤 갈수록 높아졌다. 1783년 10월 2일 시독관 임제원이 임금에게 강론한 내용이 <정조실록>에 나온다. "고경명·조헌·곽재우 등은 관직은 없었지만 충성과 의리로 사민들을 격려하여 전라·충청이 짓밟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된 마음과 의로운 담력이 나라의 명맥을 만회하고 사기를 힘차게 일으켜 명나라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극복할 가망이 있었습니다."

<순조실록> 1812년 6월 10일 자에 나오는 영의정 김재찬의 발언도 취지가 같다. 앞서 꼽은 고경명·조헌·곽재우에 김천일을 더하여 '임진사충신'이라 명명한 것만 달랐다. "조헌·고경명·김천일·곽재우가 동지를 모으고 죽기로 싸울 인사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중국도 모두 귀 기울이게 되어 오늘날이 있게 했습니다."

▲ 보덕각 안에는 1785년에 세워진 보덕불망비가 들어 있다. 장군 사후 170년가량 지난 시점이다. 보덕(報德)은 은덕을 갚겠다는 의지이고 불망(不忘)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김훤주 기자
▲ 보덕각 안에는 1785년에 세워진 보덕불망비가 들어 있다. 장군 사후 170년가량 지난 시점이다. 보덕(報德)은 은덕을 갚겠다는 의지이고 불망(不忘)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김훤주 기자

◇기강나루에 보덕비 세운 사연

1676년 숙종은 곽재우 장군을 모시는 대구 현풍 예연서원에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으로 삼았다. 1711년에는 충익공 시호와 판서 관직을 더해주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바로 집행되지 못하고 26년이 지난 1737년 영조 13년에 이루어졌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어지간한 인물이면 대부분 주어지는 범상한 조치였다.

장군에 대한 현양은 정조 시절에 많이 진행됐다. 정조대왕행장에 "임진왜란에 공훈을 세우고 목숨을 바친 신하들도 모두 세상에 알렸다"고 적혀 있다. 방법은 첫째 "충신·의사의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둘째 "충성을 드러내고 무용을 받드는 비문을 짓는 것"이고 셋째는 "홍의장군과 익호장군(=김덕령) 등 여러 사람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어귀(의령군 지정면 기강로 379)에 보덕비가 서 있다. 기강나루가 있던 자리인데 장군이 최초 승전을 일군 현장이다. 정조는 장군에게만 비석을 세우라고 하지는 않았다. 장군과 동급으로 꼽힌 고경명·조헌·김천일·김덕령에게는 모두 그렇게 하라 했을 것이다. 광주 충효동에는 어명으로 세워진 김덕령 장군과 부인의 충효를 기리는 빗돌이 비슷하게 남아 있다.

비석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홍의장군 충익공 곽 선생 보덕 불망비'가 한자로 새겨졌고 뒤편에 장군의 활동과 공적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왼편 옆면에 장군과 함께 활동한 열일곱 장령의 이름이 있고 오른편 옆면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총참모장) 채제공이 짓고 김해 사람 배동건이 써서 1785년 3월에 세웠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장군은 전쟁에서 두 가지를 하지 않았다. 첫째 왜적의 수급을 베지 않았다. 병사들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왜적을 쳐서 이기는 데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자기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선조는 공적을 따지며 '수급도 하나 베지 못했고'라고 말했다. 어쨌든 공적은 증거가 있어야 인정을 받는 셈이다.

거리낌 없이 한평생 살다 가면 그뿐인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공훈에 연연해하고 자리에 매달린다. 실학자 이덕무가 '홍의장군전'에서 남긴 촌평을 보면 장군의 인품은 그 너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장군은 공리(功利)에 담백하여 물욕을 벗어났다. …선무공신록은 조그만 공로까지 모두 적었지만 장군은 빠져 있다. 그러나 그게 장군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