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시대 공공의 적인 제사
고인을 기억하는 최대한의 선의

지난 8일,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에 다녀왔다. 최수봉 의사의 후손을 만나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최수봉 의사는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으로, 1920년 12월 27일 일본 경찰로 가득하던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됐다. 매해 7월 8일에 최수봉 의사 순국 추모제가 엄수되는 배경이다.

특히 올해는 의거 100주년이자 순국 99주년으로 추모제의 의미가 더욱더 깊었다. 지역사회 관심과 지원 덕분에 올해는 더욱더 탄탄하고 너른 터에서 추모제를 지낼 수 있었고, 후손들은 그 점에 깊이 감복하는 듯했다.

추모제 식순은 여느 행사와 비슷했다. 식전 공연으로 시 낭송이 있었고, 밀양시장을 비롯한 내빈 소개, 개회 선언, 국민 의례, 그리고 기념사, 추모사, 추념사… 헌화 및 분향과 만세삼창까지 한 뒤에야 추모제가 끝이 났다.

나는 그야말로 외부인이고, 후손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추모제를 찾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큰 감흥 없이 추모제를 지켜보았다. 뙤약볕 아래 1시간 남짓 자리를 지키며 문득 '이런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참 오랜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국민 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거의 10년 만에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마지막으로 국민 의례를 했던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는 특히나 이런 의례나 형식적인 일들과 많이 멀어졌다. 접할 일도 행할 일도 없다. 4대 보험도 없는 프리랜서에게 시무식과 종무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곧 사업체이니 어딘가 깃발을 걸어둘 일도 없고, 국가나 회사를 향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외울 필요도, 기회도 없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10년 만에 애국가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양복에, 두루마기에, 마스크까지 끼고 묵묵히 더위를 견디며 제를 엄수하는 어르신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진심이다.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 엄숙하게, 진정을 담아, 예를 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형식에 진심이 담겨있다. 지난해 일본이 수출규제를 시작했을 때, 우리나라와 일본의 양자 협의 장면을 떠올려보면 쉽다. 일본은 우리나라 산업통상자원부 인사들이 도착했는데도 앉으란 말도 없이 사람을 세워두었고, 창고에서 회의를 했다. '회의' 대신 '설명회'라는 표현을 쓰며 홀대하는 티를 팍팍 냈다.

실용주의 시대에서 제사는 공공의 적이다. 돈과 노동력과 시간이 든다는 점에서 제사는 실용주의 시대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필요한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다.

제사라는 형식은 '겉치레'라기 보다는 '정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의 오늘이 귀한 만큼, 나를 있게 한 그의 어제도 귀하다. 그 지난 시간을 오롯이 떠올릴 수 있는 하루. 이제는 고인이 된 사람을 더 많은 이와,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 그런 것들이 여름날을 채우고 있었다.

곧 아버지 제사가 돌아온다. 사계절 365일 중에 왜 하필 삼복더위 속에 돌아가셨는지 하늘에 대고 타박할 수 있을 만큼 허구한 시간이 지났다. 땀방울을 훔치며 전을 구우면서도, 그날 하루 진하게 아버지의 생을 돌아볼 수 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