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누이 보러 길 나선 송 노인
목탄버스서 징집된 청년들 보며
간도 독립군으로 간 넛손자 생각
사밧재에 줄지어 핀 질경이 모습
억세게 살아온 우리네 민중 닮아

범어사에서 출발하여 금정산 둘레길을 따라 사밧재를 지나서 양산으로 걸었다. 숲 해설하시는 선생님 두 분과 동행했다. 시작 걸음부터 더뎠다. 나무와 풀이 숲해설가 선생님 두 분의 발길을 계속 붙들었다. 숲에 무지한 학생 하나만 선생님 두 분 꽁무니에서 걸음이 바빴다. 노각나무의 표피 무늬에서 사슴뿔을 찾고, 노루오줌에서 지린내가 나는지 맡았다. 비목에서는 향기가 났고, 까치수염은 다툼없이 꽃을 피웠다.

한창 숲에 심취하시던 선생님께서, 이 산길을 함께 오게 된 처음 까닭이 생각이 나셨는지 물었다.

"이 길이 소설 속 길 맞아요?"

대체로는 맞을 터이고 적확하게는 좀 어긋날 것이다. 문학 답사가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것이 아니니 좀 어긋나면 어떠랴 싶다. 소설 <사밧재>의 송 노인이 사밧재를 걸었던 그 마음과 송 노인의 발길을 따라 걸었을 작가의 마음을 되짚어 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글쎄요."

▲ 양산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부로 <사밧재>에서 '갯목'으로 나오는 곳.
▲ 양산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부로 <사밧재>에서 '갯목'으로 나오는 곳.

◇누이 사는 갯목으로 가는 길

소설 <사밧재>의 배경은 일본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강점기 말이다. 일제의 수탈이 물적 수탈을 지나 인적 수탈로까지 이어지던 시기가 <사밧재>의 시대 배경이다.

'큰 추위'라 이름값 하는 대한(大寒)이 지났지만, 골짜기마다 눈이 여전히 푹푹 쌓여 있었다. 갯목에 사는 누이가 죽기 전에 동생 송 노인이 보고 싶다고 말을 전해 왔다. 팔순에 가까운 송 노인이 쉬이 나설 수 있는 길이 아니었지만, 누이를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앞섰다. 날이 풀리면 가시라는 손자며느리의 만류에도 약이 된다는 '배미술(뱀술)'까지 챙겨 길을 나선다.

송 노인의 누이가 사는 갯목이 어디쯤일지 잠작해 본다.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일컫고, '목'은 좁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까지 물금 앞 낙동강까지 사리 때면 바닷물이 차올랐다. 양산의 토박이 어르신들은 '거는 바다였데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바닷물이 드나드는 좁은 곳, 갯목은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그 어디메이고 그 언저리 마을이었을 터이다.

송 노인이 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범어사 어디 마을에서 사밧재를 지나 금정산을 넘어 양산 동면 양산천 끝자락 마을까지이다. 금정산 허리를 반나마 돌아야 하는 길이고, 먼저 사밧재를 넘어야 했다.

사밧재는 양산과 부산 경계가 되는 노포사송로(1077번 국도) 고개이다. '재'라고는 하지만 왕복 6차로 길로 넓혀져 긴 오르막길 정도의 느낌이다. 사밧재는 한자로 沙背峙(사배치)로 적는다. 높은 산의 고개를 이르는 '재'에 해당하는 한자가 언덕 치(峙)이고, '사바'의 한자 표기가 沙背(사배)이다. 사배(沙背)는 '새벽'의 이두식 표기로 추측한다(양산시 향토문화백과). 새벽을 여는 고개라는 의미로 '사밧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양산에서 보면 동쪽이고 해 뜨는 방향이라 그럴싸하다. 하지만 부산 동래에서 보면 사밧재는 해가 지는 서쪽이니 '새벽고개'라는 이름을 부산 사람들로서는 동의하기 힘들 터이다. '그 너머 큰 절이 있다. 아마 거기에 절이 서고부터 이 재를 사밧재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부산 출신인 김정한 선생은 소설 <사밧재>에 적고 있다.

◇목탄버스 오르는 조선인 청년들

눈 쌓인 먼길이 엄두가 나지 않아 송 노인은 목탄버스를 탔다. 버스엔 일본인 순사와 학도병으로 지원해 가는 조선인 청년들이 타고 있었다. 송 노인은 학도병으로 가는 청년들을 보며 징집을 피해 독립군이 되겠다고 간도로 떠난 넛손자(누이의 손자) 상덕을 생각한다. 상덕은 끝내 창씨를 하지 않은 제 할아버지를 닮았다.

목탄버스는 높은 사밧재를 넘지 못하고 부르릉거리기만 하더니 결국 멈췄다. 차가 멈추자, 학도병을 인솔하던 일본인 순사는 승객들에게 내려서 차를 밀도록 지시한다. 송 노인은 목탄버스에서 내린다. 잿마루에 선 송 노인은 'Y고을 쪽의 천성이니 부로니 하는 높은 봉수산들이 흰 눈을 떠 인 채 아득히 바라보'고 'T고을 쪽 봉수대가 있던 개명봉'을 왼편에 두고 사밧재를 넘는다.

소설에서 말하는 '천성'은 금정산을 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양산 천성산이고, '부로'는 천성산 너머 울산 언양에 있는 '부로산'이다. 소설에서 '개명봉'이라 언급한 봉우리는 금정산 '계명봉'이다. 금정산 둘레길에서 천성과 부로가 보이려면 금정산 북쪽 자락을 다 돌아와야 하니 송 노인이 선 곳에서 양산천과 메깃들도 보였을 터이다.

송 노인이 사밧재 마지막 자락인 돌틈이 끝 주막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떼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운전수가 실수를 했는지 벼랑 끝을 돌 무렵에 별안간 버스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는 것이다.

"다 절단(결딴)났지요. 머! 타고 있던 사람이라 캐야 아까 그 순사들하고 청년들뿐이었지만, 모르지요, 운전수하고 순사 하나나 제우(겨우) 살아날까요. 나머지는 모두 떡이 댔지요. 둘은 직사(즉사)를 했고요. 암매 지금쯤은 다 갔을지도 모릅니더. 차가 온통 편두박살이 났이니칸에요…"

소설 <사밧재>는 1971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지난 역사를 바탕한 이야기에는 역사의 결과를 아는 전지적 작가의 마음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김정한은 송 노인의 입을 빌려 '지원? 말이 지원일 테지. 와 도망질을 몬 했을꼬? 머저리 같은 녀석들! 헷공부했지, 헷공부…!'라고 말한다.

사고 현장에 있던 상덕의 친구라는 청년과 송 노인은 동행하여 메깃들로 접어든다. 운전수의 실수라고 했더냐는 송 노인의 예사로운 물음에 청년은 "글쎄요"라며 의미심장한 말로 답한다. 김정한 선생의 서술 의도대로 읽은 것인지, 그저 나의 바람대로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수가 아니었다면 의지였겠구나 하고 해석해 본다.

눈이 부리부리한 청년은 확실찮은 대답을 했다. 송 노인은 굳이 그의 표정을 살피려고도 하지 않았다.

"집이 독메에 있다 캤제?"

"야, 갯목 몬 가서…."

둘은 이러고서 묵묵히 봇둑길을 재게 걸었다. 멀리 트인 메깃들을 건너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독메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산을 일컫는 보통명사이다. 양산에서 독메라 할 곳은 증산뿐이다. 그러니 소설 속 독메는 증산이다. '글쎄요'라고 말한 눈이 부리부리한 의지가 굳센 청년은 증산 마을의 누구였을 것이다.

▲ 질메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메깃들. 질메는 사밧재를 넘어 금정산 둘레길을 돌아 양산 동면으로 내려서는 언덕바지.
▲ 질메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메깃들. 질메는 사밧재를 넘어 금정산 둘레길을 돌아 양산 동면으로 내려서는 언덕바지.

◇질경이처럼 억센 삶

숲해설가 선생님 두 분과 걷는 금정산 둘레길을 따라 질경이가 줄지어 피었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땐 질경이를 찾아 따라가면 인가(人家)로 갈 수 있어요." 질경이는 밟히고 짓이겨져도 살고, 사람 신발, 자동차 바퀴 등에 씨앗을 묻혀 번식한단다.

"아, 질(길)을 따라 번식해서 질경이군요."

숲해설가 선생님 두 분이 마구 웃으신다. "그것도 말이 되네요."

질경이 줄기를 갈라 줄기 속 심을 보여주며 질겨서 질경이라 일러주신다. 길따라 핀 질경이를 다시 생각했다. 사밧재는 '옛날부터 국도'인 동래로였다. 동래로 초입의 고갯길이거나 마지막 고갯길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삶이 이어져 사밧재를 넘었을 것이다. 송 노인의 누이에게는 시집 가는 길이고 친정 가는 길이었고, 넛손자 상덕은 일제로부터 피신하는 길이었고 독립 투쟁에 나서는 길이었다. 발에 묻어 마을로 이어진 질경이처럼 삶도 길을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간다. 때로는 밟히고 짓이겨져도 끊이지 않는 것이 삶이고, 삶은 길을 따라 피어난다.

'질긴 것이 질(길)을 만든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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