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한 차에 탔다. 엄마가 식당일을 하셔서 바다구경 한번 가기가 어려웠는데 모처럼 기회를 얻었다.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표정도 봄의 새싹처럼 싱그럽다.

가까운 마산 원전항에 내렸다. 우리는 바닷가 돌 위를 옮겨 다니며 바람을 쐬었다. 바닷바람이 옷자락을 날리며 비릿한 냄새를 한 자락 몰고 왔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착각을 일으키며 포근함마저 들게 한다.

바닷속에는 바위를 안고 자란 작은 조개들이 가득하고 그 위로 꽃게들이 얼굴을 내민다. 파도가 밀려와 물보라를 일으키고 갈매기는 놀란 듯 날아오르면 나의 시선도 먼 수평선을 향한다.

바다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깊이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소 모습보다 더 많은 진실이 엄마의 일기장에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니 엄마가 급히 나가셨는지 옷장이 모두 열려 있고 서랍에 옷이 끼어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식당일로 바쁜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옷장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옷을 개어서 서랍에 넣는데 바닥에 검은색 공책 하나가 손에 잡혔다. 어느 제약회사 첫 장을 넘기자 오래된 옷장 냄새가 코끝에 풍겼다. 1990년의 달력을 넘기자 음식 레시피, 지인의 전화번호, 엄마의 속마음 등등 삶의 흔적들이 엄마의 특유한 날림체로 빼곡하게 씌어 있었다. 엄마의 일기장을 찾은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고 평소 하시는 말씀이라고는 우리가 학교는 잘 다니는지, 친구와 잘 노는지, 공부는 잘 되고 있는지, 무슨 반찬을 먹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물을 뿐이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굳건한 모습만 보이셨다.

언젠가 식당에서 돌아오신 엄마께 이렇게 힘든데 왜 한 번도 울지 않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안 우는 거야"라고 짧게 답하였다.

일기 속의 엄마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었다. 기쁜 일보다 슬픈 일들이 많이 적혀 있었다. 평소에 엄마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데 고민이 많으시고 힘들게 느껴졌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가 마지막으로 일기 끝에는 오빠와 나 때문에 힘든 티 내지 않고 살아간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나는 나름 엄마 입장을 잘 이해한다고 여겼지만 일기를 읽고서야 엄마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내가 잘못될까봐 염려하시는 잔소리에도 화를 내는 나를 언제까지나 품어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엄마는 늘 바다처럼 손이 차갑다. 가게 일을 시작하기 전 엄마의 고운 손과 다르게 주부습진에 굳은살이 배기어 울퉁불퉁하다. 엄마의 손을 보자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늦게 가게를 마치고 집까지 차로 꼬박 30분을 달려서 보통 12시가 넘어서야 집안까지 들리는 16년 된 차 엔진 소리를 내며 오신다.

그러곤 아빠와 마주앉아 가게 얘기를 나누신다. 문틈으로 엿들으면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진상손님이 와서…"

하며 소주를 따르신다. 힘든 엄마 모습이 마음속에 사무친다.

바다는 겉으로 보면 늘 파란색이다. 그러나 바다를 알고 보면 많은 생물들이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지구를 정화하고 기온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엄마도 겉으로만 보면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한 모습이지만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맞서며 슬픔을 이겨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바다다.

지상에서 변치 않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오라는 명령에 천사는 엄마의 사랑을 찾았다고 한다. 나도 엄마의 일기를 통해 우리들을 향한 무한한 정성과 사랑을 깨달았다.

바다경치를 즐기는 작은 엄마의 마음속에 바다보다 넓은 사랑이 숨어 있다는 깨달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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