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정암진 승첩' 적 말뚝 뽑아 진군로 교란
장군 옷 입은 기병 유인술
패배 익숙했던 조선군에 장군 잇달은 승리 본보기
백성 자긍심·용기 북돋아

임진왜란 당시 곡창지대 호남을 두고 지키느냐 뚫리느냐에 조선과 왜군은 필사적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급이라는 사실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다. 전라도 사람들이 진주성 전투에 먼저 나서 싸운 것도 왜적이 진주를 치는 최종 목적이 바로 호남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장군이 정암진을 지킨 덕분에 왜적은 전라도로 들지 못했다. 진주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정암진이었고 진주성은 호남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바다를 지켰지만 장군이 정암진을 지키지 않았다면 전라도는 온전할 수 없었다.

곽재우 장군의 여러 업적 가운데 정암진을 지킨 것이 가장 크다는 기록은 곳곳에 나온다.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을 건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재우의 공이다"(<선조실록> 1592. 6. 28.) "재우가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머물도록 하니 하도(충청·전라·경상도)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1592. 6. 1.) 전란이 끝난 뒤 해평부원군 윤근수는 이렇게 말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군병을 일으켜 정진을 가로막아 지키며 왜적의 진군을 차단해 여러 차례 예봉을 무너뜨리고 기세를 꺾어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공적이 위대합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608. 8. 13.)

◇말뚝 뽑아 옮기고 기병 전술도 쓰고 = 장군이 정암진에 몰려든 왜적을 물리친 적은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가 정암진 승첩이다. 자세한 기록은 <망우집>의 '용사별록'에 나온다. '용사별록'을 쓴 이로는 초유사 김성일의 수행원인데 장군에게는 둘째 부인의 아버지 즉 장인이었다.

"적장 안국사가 호남을 빼앗겠다며 병사를 서쪽으로 끌고 왔다. 선봉이 이미 정진에 도착했는데 진창이 있어 다닐 수가 없으므로 적군이 먼저 길잡이를 시켜 높고 마른 땅을 골라 말뚝(나무깃발)을 꽂아 아침에 건너려 했다. 장군이 몰래 살펴 알고는 밤중에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 말뚝을 진창으로 옮겨두고 엎드려 숨었다. 적들이 오다가 빠져 벗어나지 못했고 복병이 일어나 드디어 덮쳤는데 곧바로 적군이 크게 쳐들어왔다. 장군은 적은 병사로는 깨뜨리기 어렵고 깨뜨리지 못하면 정진을 보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날쌘 장사 십수 명을 뽑아 따르게 하고 자신은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탔다. 장사들도 장군처럼 차리게 하고는 북을 치며 적진 바로 가까이 좌우로 내달리며 유인했다. 적들은 모양새가 장군이므로 진을 비운 채 10리 남짓 쫓았는데 산골에 들어서며 놓쳐버렸다. 놀라고 미심쩍어하는데 갑자기 앞쪽 언덕에 또 붉은 옷 흰 말 차림이 북을 치며 외쳤다. 더욱 놀라 추격했으나 잠깐만에 또 놓쳤는데 북과 나팔 소리만 산을 울리고 깃발은 언덕에서 나부꼈다. 적들은 신과 같다면서 더욱 놀랐고, 군사가 적은지 많은지도 몰라 쳐들어오지 못했다. 장군은 강한 세뇌를 숨겨 놓고 나무가 빽빽한 데를 따라 좁은 길로 왜적이 돌도록 해서 번번이 쏘아 죽였다."

왜적을 진창에 빠뜨려 무찌르려 했으나 대부대가 들이닥치자 기병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활을 쏘아 물리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곽재우 장군을 두고 홍의장군이라 이르도록 만든, '붉은 옷을 입고 흰 말을 탄 모습'도 여기에 나온다.

이로는 <용사일기>도 남겼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안국사라 일컫는 왜장이 자칭 전라감사라며 창원에서 함안으로 와서 사람을 시켜 의령으로 공문을 보냈다. 재우가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찢어 불사르고는 정암진에 달려가 진을 치고 기다렸다. 적이 함안 백정 두셋을 사로잡아 먼저 나루터에 보내 미리 배를 정비하게 하니 선봉은 이미 10리 밖에 다가왔다. 재우는 백정들을 끌고 와 매질하고는 배를 가라앉혀 여울을 막았다. 적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좌도로 물러나 무주와 금산을 거쳐 전주에 이르려고 김천을 향해 갔다."

정암진 승첩을 짧게 대략 적은 기록도 있다. "왜적이 전라감사를 일컬으며 의령 정진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가 의병(疑兵)을 설치해 물리쳤다."(<난중잡록> 1592. 5. 26.) "적이 우도로 침입해 왜장 안국사가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재우가 강변을 오가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많이 죽었다."(<선조수정실록> 1592. 6. 1.)

▲ 장군이 정암진 승첩을 일군 자리인 의령 들머리 솥바위 일대 모습.
▲ 장군이 정암진 승첩을 일군 자리인 의령 들머리 솥바위 일대 모습.

◇정암진 승리는 최소 세 번 이상 = 처음에 왜적은 전라도·충청도 점령은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서울만 점령하면 저절로 들어온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선조가 서울 함락(5월 3일) 사흘 전인 4월 30일 달아남으로써 단기전 계획은 어그러졌다. 그래서 남해를 건너가려 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왜적 수군은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크게 깨졌으며 같은 날 합포와 이튿날 적진포에서도 조선 수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육지였지만 왜적은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왜적은 파죽지세였고 조선은 추풍낙엽이었다.

이날 정암진 전투는 왜적의 본격적인 전라도 침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정암진에서 이렇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왜적은 정암진 말고 다른 루트도 찾기 시작했다. 정암진이 어렵다면 낙동강 물길을 올라가 초계·고령이나 성주를 거쳐 넘어가자는 생각이었다. 지금 보자면 합천 황강이나 성주 신천을 거슬러 전라도에 들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암진을 바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른 루트를 찾는 경우도 먼저 정암진에 들러 간을 본 다음 뱃머리를 돌렸다.

<난중잡록> 1592년 6월 6일 자에서는 정암진 다음으로 왜적들의 뱃머리가 향한 데는 창녕과 성주였다. "적선 18척이 쌍산역(달성군 현풍읍 성하리)에서 올라와 정승 안국사의 행차라며 가야산을 구경하겠다 했다. 전날 정암진에서 곽재우에게 퇴각당해 영산을 지나 창녕에서 낙동강을 건넌다며 공문을 보내 전라감사로 호남을 향하니 맞이하라 했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 달려가 병사와 방비를 엄격하게 갖췄다. 왜적은 '홍의장군이니 건너갈 수 없다'면서 물러나 쌍산을 거쳐 성주로 향했다."

이 밖에 장군이 정암진을 지킨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같은 달 19일자 <난중잡록>에서는 장군이 정암진에서 경북 성주까지 먼 거리를 대치하며 오르내렸다. "왜적 안국사와 정진에서부터 강을 낀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왜적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을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또한 바라보며 뒤쫓아갔다. 안언역(성주군 용암면 상언리)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교전했는데 왜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겨우 수급 몇 개만 얻고 물러났다."

6월에는 18척으로 왔지만 7월에는 왜적이 그보다 4배가량 많은 적선을 몰고 온 적도 있었다. <고대일록> 7월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적선 70척 남짓이 의령 땅에 상륙하니 의병장 곽재우가 힘껏 막았다.(2일) 왜적이 연노(연달아 쏠 수 있는 활)에 살해된 것이 10명 남짓 보였다. 이에 낙동강 하류로 달아났다(3일)." 결국 장군은 이를 막느라 이틀 동안 힘겹게 싸웠고 왜적도 의령 땅을 밟기는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적은 군사로도 왜적을 이긴 배경에는 = 장군의 정암진 수비 활동은 정암진 승첩 이전에도 있었다. 장군은 의병을 일으키자마자 의령에 있던 왜적을 내쫓음과 동시에 왜적이 들지 못하도록 막는 활동도 함께했다. <쇄미록> 1592년 5월 치에 있는 '경상도 유생 곽재우가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가 증거다. "이달 4일에 용감한 장사 넷을 데리고 낙동강 하류에서 왜선 3척을 쫓아버렸고 6일에는 왜선 11척이 4일 전투를 벌인 데로 또 왔기에 용감한 장사 13명을 거느리고 쫓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강전투'의 실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투에 나선 군사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적선 1척당 1명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적은 군사로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이다.

여기에는 이런 비밀이 숨어 있다. 왜적은 서울을 함락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었기에 한 번 쓸고 지나간 지역에는 군사를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다행히도 의령은 서울로 가는 길목이 아니어서 왜군의 점령 대상도 아니었고 창원·창녕 등 이웃 고을을 점령한 왜적들이 한 번씩 와서 분탕질하는 곳이었다. 장군은 이런 상황에서 용감하게도 얼마 안 되는 인원이나마 의병을 일으켰고 왜군들은 분탕질할 데가 많았기 때문에 의령은 장군 때문에 성가셔서라도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정암진 승첩 역시 군사가 많아서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망우집>에는 장군이 전란 초기에 초유사 김성일에게 올린 또다른 편지가 실려 있다. 언제 보냈는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내용으로 짐작하면 빨라도 6월 중순이었다. 여기서 장군은 "처음에는 병졸 4~5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공격하다가 다음에는 수십 명으로 왜적을 추격했으며 지금은 100명 남짓 병사로 왜적의 머리를 베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5월 26일 정암진 승첩을 이룰 때도 군사는 100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장군의 기강전투 전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장군의 기강전투 전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백성들에게 희망나무가 된 두 전투 = 곽재우 장군이 싸워 이긴 기강전투와 정암진승첩을 임진왜란 초기 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꼽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강전투는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 조선이 이룩한 최초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 승리(5월 7일)보다 빠르게 가장 먼저 이긴 전투였다. 이어진 정암진 승첩은 육지에서 일본 정규군과 맞붙어 조선이 이긴 첫 전투였다.

조선 군대는 이전에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붙는 족족 대항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상황에서 장군의 승전은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마음에 무엇보다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침공도 해오기 전에 지레짐작으로 달아났던 군병과 백성들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증명이 되었으며 나아가 싸울 수 있겠다는 용기까지 북돋아 주었다.

수령들이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도 장군은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였다. 남원부사 윤안성은 격문에서 "선비 곽재우가 왜적에 완전 함락된 땅에서 시골 군사만 거느리고도 두 차례 적병을 몰아내어 적선이 다시는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으니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는 듣기만 해도 절로 탄복이 나온다. 그런데 전라도는 아름다운 풍속이 으뜸이면서도 아직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니 매우 수치스럽다"(<난중잡록> 1592. 5. 20.)고 했다.

장군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의령 일대가 왜적의 공백 상태였던 것은 어쩌면 천운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다. 하지만 운을 잡을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실력이다. 제대로 단련되지 못한 오합지졸을 이끌어 기세등등한 왜적과 맞서 싸우면서 보여준 그의 신기한 계책과 정확한 판단은 대단했다. "외로운 군사로 낙동강변을 오가며 앞장서 왜적을 치고 머리를 베니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멀고 가까운 데서 메아리치듯 호응했습니다."(<학봉집>) 그의 명성은 기록으로 남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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