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운 속에서 피난 정부와 기관·학교 등이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피난민들과 함께 많은 예술인이 남하하였고, 수도권 중심문화권이 남류하는 현상을 드러내었다. 해방 직후 미술계에도 좌우익으로 갈라지면서 6·25가 발발하자 일부 월북작가도 있었으나 대부분 북에서 1·4후퇴 때 월남한 피난 작가군이 수도권 서울 작가들과 함께 피난 정부를 따라 남쪽으로 유입되었다.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대구·마산·진해 등지로 남하한 작가들은 당장 해결해야 할 식생활 등의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 군수물자로 연명하기도 하고, 부두 노동 일과 잡종직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는데, 부산 영도의 도자기공장에서 도자기 제작과 도화(陶畵) 그리는 일에 화가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화가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삶의 고난 속에서도 오직 창작열에 불타오르는 작가들의 전람회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크게 주목되는 일이다.

이중섭은 마산을 경유하여 부산·충무에서 전혁림과 지내면서 따스한 남쪽 바다의 자연관에 매료되어 물고기·가재 등의 바닷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내었다.

국전의 문교부장관상까지 수상한 최영림은 북에 처자식을 두고 단신 월남한 작가로 좌익계를 피하여 금강산에 머문 장리석을 만나 지내다가 다시 남하하여 마산에 피난 내려온 삼촌과 마산 생활 속에서 마산상고와 성지여고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최영림은 흑마회(黑馬會)를 이끌고 항일운동을 한 김주석과 지내면서 오동동 단칸방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정을 쏟았고,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그리움에 가슴 메는 나날을 보내면서 그림의 소재로 여인이나 가족을 자주 등장시켰다. 최영림의 '여인의 일치'라는 국전 문교부장관상 수상작을 비롯해 흑색의 투박한 화면은 암울했던 마산의 흑색시대 10년을 상징한다.

나건파는 부산 생활 중에도 마산 가포의 갈마산정의 스케치 여행을 이어갔고, 파스텔화가 강신석은 마산 앞바다의 돝섬 전경으로 마산 사랑을 보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지낸 조각가 김세중은 마산성지여고 교사 시절에 마산고교 교사인 김남조 시인과 애정을 나누다가 결혼까지 하였다.

유택렬 화백은 1·4후퇴 때 3남매가 흥남부두에서 남하하여 거제·부산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진해에 정착하여 해군교재창 근무를 시작으로 다시 진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진해해군 생활 중에 남쪽 바다의 낭만과 해양도시 진해에 매료되어 진해 사람으로 남는다. 진해중을 비롯한 중등 미술교사와 진해미협 회장, 진해예총 회장, 진해군항제 부위원장을 맡아온 진해의 꽃이라고 할 정도로 진해 예술계의 중핵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 밖에 1951년 1·4후퇴와 함께 월남한 작가로 윤중식, 장리석, 한묵, 황염수, 박항섭, 박창돈, 송혜수, 박수근, 황유엽, 함대정, 차근호 등과 미술학도였던 김태, 김찬식, 김충선, 김영환, 안재후, 김한 등이 있고, 별도로 월남한 조동벽, 염태진이 있다.

이같이 전란기의 침울한 상황에서 피난 예술가들이 남방미술문화권역 속에 묻어둔 일화들과 더불어 지역미술문화에 내려준 영향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그해 6·25 전란기로부터 70년이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내다볼 때 이 지역의 남방미술문화권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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