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태 전 교수가 쓴 백촌 일대기
형평운동사 흐름 이해하는 데 도움
양반 신분이었지만 인권운동 앞장
백정 신분해방 외치며 형평사 창립
100여 년 흐른 지금도 그 가치 유효

진주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한 형평운동은 우리나라 최초 반차별 운동으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강조했다. 그 중심에 백촌 강상호가 있었다.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는 형평사 창립 97주년을 맞아 조규태 전 경상대 교수가 쓴 백촌 강상호 전기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제도적 신분차별은 없어졌으나 이후에도 백정 차별은 여전했다. 1920년대까지도 오랜 관습은 이어졌는데, 백정 신분으로 형평운동에 참여했던 장지필의 증언을 보자.

"그뿐 아니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민적이 필요합니다. '도한'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쫓아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자손손, 귀머거리, 벙어리 되라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죄악이라 할는지요."(84쪽)

책은 백촌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동시에 형평운동사의 태동과 부흥, 쇠락을 담았다. 그러니 형평운동 자체를 공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백촌은 대대로 이름 있는 양반 가문이자 부호의 자제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채보상운동, 항일 독립운동, 신분 해방운동 등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백촌이 형평운동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그가 3·1운동으로 체포됐다 풀려나 진주로 오는 길에 들은 충격적인 소식이다. 진주 대아중고등학교 설립자인 아인 박종한 증언이다.

▲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사진은 2017년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이전한 형평운동기념탑.  /경남도민일보 DB
▲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사진은 2017년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이전한 형평운동기념탑. /경남도민일보 DB

"'진주에 도착하니 그때 마침 백정이 양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하신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93쪽)

하지만, 당시 진주에서는 이미 형평운동이 일어날 만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1905년 진주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1909년 처음으로 백정과 비백정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예배를 보는 일이 생긴다.

1906년에는 진주 백정들이 갓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으며, 이 무렵 백정 중에서 진주성 밖 집단거주지가 아닌 진주 시내로 옮겨와 살며 일반인과 이웃해 정보를 교환하던 이들도 있었다. 책은 이런 사회적 토대가 형평운동 출발에 일조했다고 설명한다. 마침내 백촌을 임시 의장으로 1923년 4월 25일 '저울처럼 고른 세상을 만드는 단체' 형평사가 창립한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를 만든 취지라." (100쪽)

억눌렸던 백정들의 울분이 터져 나오듯 형평운동은 빠른 속도로 전국에 뻗어나갔다. 각지에서는 형평사원과 일반인의 충돌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사원들 간 결속력을 키우고 형평운동을 더욱 발전시킨 자극제였다. 하지만, 이후 운동 방향을 두고 내부 갈등이 이어지고, 급기야 일제에 부역하는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형평사는 '대동사'로 이름이 바뀐다.

백촌은 형평사 안팎으로 갈등이 있을 때마다 운동을 본래 취지대로 이끌어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형평운동은 끝내 손 쓸 수 없이 변질했고, 백촌은 가정으로 돌아가 어렵게 살다 가족들 곁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한평생 바친 노력은 전혀 헛되지 않았다. 형평사원이었던 이복수의 추도사에 그 고마움이 담겼다.

"선생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시어서 우리들로서도 저 유명한 국제무대의 제13회 독일 수도 백림(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전 일본대표로서 이규환을 비롯해 제14회 영국 수도 런던 올림픽 대회에 이규혁…그 외에도 숨은 허다한 명사들을 오늘날같이 길러주신 그 토대의 선생님이 누구이셨습니까? 모두가 다 선생님이셨습니다." (174쪽)

백촌이 강조한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을 이뤄낸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닐 테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비공식적인 계급이 존재한다. 비정규직, 이민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백촌이 추구한 '저울처럼 고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형평운동의 가치가 아직도 유효하며, 지금도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펄북스 펴냄. 204쪽. 1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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