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존중하는 자비로 이어져
모두가 기본을 지킬 것이란 믿음

무엇이 범죄이고, 그것에 어떠한 형벌을 과할 것인가를 규정한 형법상에 '신뢰의 원칙'이란 법리가 있다. 이는 교통법규를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운전자는 다른 사람도 교통 규칙을 잘 지킬 것이라 믿으며, 그들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하여 행동하는 것까지 예견해 주의할 의무는 없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면, 운전자가 자동차 전용도로나 고속도로에서는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의하며 운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자전거 혹은 무단횡단하는 보행자와 차량 간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일반 도로와 달리 자전거를 탄 사람이나 보행자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물론 운전자에게는 '무단횡단이나 자전거 운행 같은 비이성적인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경우에 한한다'는 단서가 필요하다.

또한, 나는 법과 질서를 지키고 신의와 신용을 중시하며 타인을 배려하기에 타인도 당연히 경우에 어긋남이 없이 나처럼 그러하리라 믿게 되는 것이다.

신뢰의 원칙은 법리적 이론이나 해석을 떠나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며 더욱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모두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약속이나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상대를 배려하듯이 상대도 나를 챙겨 줄 것이라는 마음, 내가 기본을 지키듯이 타인도 기본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 인간의 도리·사회통념·선량한 풍속·순리적 사회질서 등 신의성실 원칙으로 표현되는 조리(條里) 또한 신뢰의 원칙에 속한다. 앞서 나열한 원칙은 결국 최소한 준법 의식과 질서 의식이 필요할 뿐 거창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부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형제간 우애심을 발휘하고, 직장에서 동료 간 화합하고 서로 존중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바깥에 나와서는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그 사람의 내·외적 영역을 지켜주고 보장해주는 배려심 등이 이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신뢰의 원칙 일부다.

내가 너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침범을 하지 않는다면 너도 내 삶의 울타리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신뢰의 원칙이고 신뢰 보호의 원칙이다.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고 부모가 어린 자녀를 끔찍하게 학대하는 패륜, 갈등으로 말미암은 동료 간 칼부림,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생면부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묻지 마 폭행…. 차마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인간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어그러지는 일은 문명 이래 다져 온 인간관계, 즉 신뢰의 원칙이 무너지고 힘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무뢰배 세상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려해야 한다.

신뢰의 원칙은 나 자신을 위한 원칙이며 상대를 존중하는 언행은 자비의 원칙이다. 내가 먼저 가족을, 동료를, 이웃을 알아주고 그들의 삶을 배려해주고 최소한 영역을 지켜주는 마음과 실천이 하나둘 모여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할 때, 상대 역시 나를 존중하는 자비의 원칙을 실행할 것이다.

신뢰의 원칙과 자비의 원칙은 둘이 아닌 하나로, 내가 기본과 도리를 다한다면 상대도 도리를 지킬 것이며, 그러다 보면 결국 모두가 서로 신뢰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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