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항 걸어온 길 / 3·15 때 부산일보 마산특파원
총상자 나오자 시장 찾아 항의…자료수집 앞장 의거사 발간 초석
최갑순 걸어온 길 / 부마항쟁 당시 경남대 3학년
수감생활 인권탄압 저항 고발…진상규명·증언집 발간에 헌신

"평화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민주주의로 평화를 이뤄야 한다. 그렇게 이룬 평화만이 오래도록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다."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 가치를 이렇게 일깨웠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나눔과 상생의 민주주의'라 강조하기도 한 문 대통령은 그 가치를 지키는 데 이바지한 19명에게 훈·포장과 표창을 수여했다.

지역에서는 이순항 3·15의거기념사업회 고문과 최갑순 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민주화 운동과 한국 인권 향상에 앞장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특히 이번 포상은 정부가 민주주의 발전 유공 부문을 신설했고, 시민사회·유관단체 추천을 받아 대상자를 선정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 지난 2012년 5월 본보와 인터뷰할 당시 이순항 3·15의거기념사업회 고문. /경남도민일보 DB
▲ 지난 2012년 5월 본보와 인터뷰할 당시 이순항 3·15의거기념사업회 고문. /경남도민일보 DB

◇이순항 3·15의거기념사업회 고문 공적 = 지난 9일 청와대는 6·10민주항쟁 기념식과 관련한 보도자료에서 이 고문 공적을 '1960년 3·15의거 당시 적극적인 보도와 3·15의거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아 자료 발굴과 수집, 3·15의거사를 발간하여 민주화 정신 계승에 기여' 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설명처럼 이 고문은 3·15의거 당시 부산일보 마산특파원으로 일하며 투쟁현장을 누볐다. 이 고문은 1960년 3월 15일~4월 27일 마산시민과 학생을 밀착 취재하며 경찰의 잔학성을 보도했다. 3월 15일 밤에는 총상자가 마산시청 세무과에 방치되자 마산시장을 만나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 3월 19일~24일에는 3·15 투쟁 실상을 다룬 '나는 마산소요를 목격했다'를 5회 연재했다. 이 밖에 이 고문은 김주열 열사 시신 사진을 촬영한 동료 기자와 동행하는 등 3·15의거 당시 주요 기사만 9차례 이상 쓰며 4·19혁명 발발 동력이 됐다.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는 이 고문 노력은 3·15의거기념사업회 창립으로 빛을 발했다. 문민정부 이후 마산에서는 3·15의거를 기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태동했는데, 이를 계기로 1993년 7월에는 3·15의거일을 옛 마산시 기념일로 제정하는 조례가 공포되기도 했다. 앞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이 고문은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으로 마산 민주주의 새 지평을 열었다. 회장 기간과 그 이후 3·15의거 관련 자료 발굴과 수집에 앞장섰던 이 고문 노력은 2004년 마산 3·15의거사 발간 밑바탕이 됐다. 준비 4년 만에 발간된 이 책은 미확인 사실들을 모두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자료와 연구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정사(正史)라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주의와 이 고문의 연결고리는 1999년 도민주주 신문 <경남도민일보> 창간으로 이어졌다. 이 고문은 1999년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2003년까지 <경남도민일보>를 이끌며 권력화된 토호언론의 병폐를 극복하는 데 힘썼다.

이 고문은 건강상의 이유로 인터뷰에 응하지 못했다. 이 고문은 그의 저서 <3·15의 눈으로 보다>(2016, 3·15의거기념사업회 발간)를 통해 3·15의거 의의와 민주주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민초를 분노시키면 제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힘이 세더라도 결코 당해낼 수 없다. (중략)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도 바른정치, 신뢰받는 정치를 해 국민을 잘 모셨으면 한다. 그것이 바로 3·15의거 정신이다."

▲ 지난해 9월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는 최갑순 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연합뉴스
▲ 지난해 9월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는 최갑순 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연합뉴스

◇최갑순 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공적 = '1979년 부마민주항쟁·1987년 6월 항쟁 주도적 참여, 여성운동을 통한 여성인권 향상·성폭력특별법 제정,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설립 등으로 민주발전에 기여'했다. 청와대가 내놓은 공적 평가는 최 전 회장의 삶을 요약했다.

1979년 경남대 국어교육학과 3학년이었던 최 전 회장은 그해 10월 부마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붙잡혀 50여 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상황을 두고 최 전 회장은 '평범한 여대생 눈으로 볼 때도 인권탄압이 분명했다', '오후 5시에 3·15의거탑 앞에서 모이자고 선동하다가 교문 밖으로 쫓겨났다', '짐승같이 맞으며 취조받았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 부림시장 아주머니들도 시위 학생들을 숨겨주고 물을 주며 동조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모진 시기를 겪으며 최 전 회장 삶은 분명해졌다. 1979년 부마항쟁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본 최 전 회장은 자신이 직접 겪은 고통의 근원을 없애고자 1986년 지역 최초로 민주적 여성운동 단체(경남여성회)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0~1991년에는 경남여성회 회장직을 맡아 여성의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최 전 회장은 지방 최초의 성폭력상담소, 여성인권상담소 설립, 낙동강 페놀방류 대책위 활동 등도 이어갔다. 최 전 회장 투쟁은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일·가정 양립의 제도화, 경남 여성 후보 발굴을 위한 공대위 조직 등으로 결실을 보았다.

과거를 잊지 않는 일도 계속됐다. 최 전 회장은 (사)부마민주항쟁 경남동지회와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하며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증언집 발간 사업에 앞장섰다.

특히 고 유치준 씨 관련 진상파악에 주력하며 40년 만에 부마민주항쟁 관련 첫 희생자(사망자)로 인정되는 데 이바지했다. 지난 2018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출범에도 힘을 보탠 최 전 회장은 현재까지 부마민주항쟁 진상을 밝히는 데 노력하고 있다.

최 전 회장은 "마산시민 모두가 함께한 일이다. 결코 나 혼자만 돋보여서는 안 될 일"이라며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 관심으로 자라는 나무와 같다"는 최 전 회장의 옛 인터뷰 내용은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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