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요구와 운동의 방향성 다를 수도
지난 30년 성찰하고 지속성 함께 고민을

여성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몇몇으로 구성된 단톡방이 있다. 조용했던 단톡방이 최근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 회견을 비롯해 윤미향 의원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 보도되면서 시끄러워졌다. 한편에서는 정대협과 정의기억연대로 이어진 그간의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들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 지원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적으로 알려내고 해결하는 것까지 폭넓게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침묵했다. 그날 하지 못한 말을 여기에 담아 본다.

나는 현재 연구자지만 오랜 시간 성폭력, 가정폭력을 비롯한 성매매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운동은 특히, 피해자 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 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예방하기 위해, 잘못된 성문화, 구조적 문제를 바꾸기 위한 활동도 함께 한다. 그것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때때로 지나치게 운동 중심이 되기도 하고 때때로 너무 피해자 중심으로만 흘러 운동 방향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지난 30년의 '위안부' 운동 또한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고,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어진 시민단체는 피해자 문제를 통해 전시 상황에서의 여성 폭력, 보편적 여성 인권 문제까지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이야기한 '성노예'라는 표현 또한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할머니는 '성노예'라는 표현에 반감을 드러냈지만 정의연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실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국제사회로 이슈화하기 위해 '성노예'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997년 일본의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수령을 반대했던 정대협과 기금을 받고자 했던 할머니와의 갈등 또한 마찬가지이다.

피해자들의 요구와 운동의 방향성은 다소 다를 수 있다. 또한,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의 모든 요구를 전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피해자 개개인의 요구 또한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으로 '위안부' 운동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계기로 지난 30년간의 '위안부' 운동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피해자에 기반한 운동을 하는 단체는 피해자의 요구를 수렴하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위안부' 운동이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집중하여 정작 할머니들의 요구는 외면하지 않았는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하진 않았는지, 순결한 피해자의 이미지로 할머니들을 성역화하진 않았는지, 할머니들보다 정대협과 정의연으로 이어지는 단체의 활동이 중심이 되진 않았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들이 17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이는 비단 정의연만의 과제는 아니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침묵하거나 외면했던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이용수 할머니, 윤미향 의원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과 비난을 멈추고 우리 세대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향후 '위안부' 운동의 지속성에 대한 고민을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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