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대 학생 시위 기점으로 고속도 점거·가스차 농성
소강 국면에 기폭제 역할
경남시민연대 '진주길 따라' 시위 주도했던 해설사 동행
현장 둘러보며 의미 되새겨

"이곳은 6월 항쟁 당시 무대가 설치된 곳이다. 격렬했던 시위의 한복판이었다."

7일 오전 진주시 중앙시장과 옛 진주극장이 있는 대로에 선 김임섭(전 진주시의원) 해설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현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김 해설사는 6월 항쟁 당시 노조 지도부로 직접 시위를 주도하고 구속까지 됐다.

그는 "학생들이 몸에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감추고 있다가 호각을 불면 일제히 대로로 뛰어나와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싸웠고, 우리도 호각에 맞춰 한꺼번에 도로로 뛰어나와 시위를 했다"고 떠올렸다.

6월 항쟁 33주년을 맞아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대표 정현찬)가 이날 '민주항쟁 진주길 따라' 행사를 마련했다. 6월 항쟁 당시 진주에서 일어난 뜨거웠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취지다.

이날 행사에는 200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6월 항쟁 영상을 시청하고, 사전 설명도 들었다.

▲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대표 정현찬) 등이 1987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기념하고 당시 뜨거웠던 현장을 찾아가는 '민주항쟁 진주길 따라'를 마련한 가운데 참가자들이 옛 진주극장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김종현 기자
▲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대표 정현찬) 등이 1987년 6월 민주항쟁 33주년을 기념하고 당시 뜨거웠던 현장을 찾아가는 '민주항쟁 진주길 따라'를 마련한 가운데 참가자들이 옛 진주극장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김종현 기자

조창래 진주참여연대 상임대표는 "1987년 6월 15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풀리면서 주춤했던 시위는 6월 17일 경상대 학생 등의 남해고속도로 점거와 LPG 수송차량 징발로 다시 점화됐다"며 "진주 시위를 기화로 주춤했던 6월 항쟁의 불꽃이 다시 붙게 됐다"고 진주 6월 항쟁의 의미를 부여했다.

조 상임대표는 "진주의 본격적인 거리시위는 6월 15일 시작됐다. 경상대에서 교문 투쟁을 계속하다가 동력이 만들어지면서 후문을 통해 시내로 진출, 진주역에서 1차 시위를 한다. 이어 진주시청 앞 집회와 방송국 등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조직을 3개 조로 나눠 각각 시가전을 전개했다"며 "오늘 걷는 코스는 6월 15일 항쟁 루트 가운데 세 번째 조가 갔던 길을 따라갈 것이다. 내년에는 당시 16일, 그다음 해에는 17일 항쟁 루트를 따라 걷는 행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8개 조로 나눠 진주교육지원청을 출발해 진주경찰서, 진주극장, 중앙시장, 옛 진주MBC, 수정파출소, 옥봉성당, 옛 부산교통 주차장, 진주시청 등을 거쳐 진주교육지원청으로 복귀했다.

해설사가 함께 코스를 걸어가면서 설명을 곁들였다. 해설사는 당시 시위에 주도했거나 교육을 받은 시민단체 회원들이 맡았다.

▲ 당시 <조선일보>에 보도된 유월항쟁. 1면에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사회면에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연합뉴스
▲ 당시 <조선일보>에 보도된 유월항쟁. 1면에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사회면에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연합뉴스

'당시 고속도로 점거 현장에 있었다'는 김민찬 해설사는 "학생들에게 6월 항쟁의 의미를 억지로 강요하기보다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 걸으면서 진주의 변화된 모습과 함께 6월 항쟁 의미를 설명했다"면서 "학생들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여 흐뭇했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가한 경상대 이재욱 학생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이나 부마항쟁은 들었지만 진주에서의 6월 항쟁은 처음 접했다. 현장에서 해설사의 설명까지 들어서인지 당시 선배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고 가슴이 뿌듯해졌다"고 말했다.

정현찬 대표는 "6월 항쟁이 잊히고 있다. 오늘 행사는 6월 항쟁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한다"며 "6월 항쟁은 민중이 떨쳐 일어나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크게 보면 촛불혁명까지의 연결고리가 됐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에는 걷기뿐 아니라 수제공책 만들기, 캘리그래피, 1987년 사진전 등 체험부스도 마련됐다.

한편, 오는 17일 예정이던 6월 민주항쟁 기념 표지석 제막식은 연기됐다. 경상대 민주광장에 표지석을 세울 계획이었지만 총장 교체시기와 코로나 19 등이 맞물려 양측의 논의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아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지석은 경남도 지원을 받아 제작됐으며, 앞면과 옆면에는 '민주주의 유월항쟁 기념',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6월은 뜨겁고 찰진 함성 헛되지 않았네'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1987년 경상대 학우들의 투쟁이 전국적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기에 여기 비를 세워 기념함. 경상남도(지사 김경수), (사)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라고 돼 있다.

 

▶ 진주 6월 항쟁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고자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민주화 운동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 밝혀졌다. 6월 9일 연세대 시위에서 이한열 군이 직격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지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대규모로 벌어졌고, 서울지역 시위대는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15일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면서 서울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진주에서는 1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대가 진주 시내 거리를 장악했다. 16일에도 진주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됐고, 17일에는 시위대가 경전선 철도와 남해고속도를 점거하고 LPG 운반트럭 2대를 탈취해 경찰과 대치했다. 진주 투쟁은 18일 자 전국 주요 언론은 물론이고 <워싱턴포스트>와 <타임> 등 외신에도 대서특필됐다. 18일 경상대는 조기 방학에 들어가 가두시위를 계획했으나 세력 부족으로 경상대생 50여 명이 교문투쟁, 진주교대생 4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다. 이후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6·29 선언'을 했다. 7월 5일 이한열 군이 결국 사망했고, 9일 시민·학생 100만여 명이 서울시청 앞에 운집해 고 이한열 군의 영결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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