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부인 험한 뱃길 종착지 '물금나루'
가사 시달리는 아낙네 삶 예견하는 듯
몸종 옥이, 토교에서 정신대 징집 모면
오늘날 여성 삶 얼마나 바뀌었나 반추

낙동강 마지막 굽이에 자리한 황산공원에 강을 끼고 이어진 길은, 오랜 옛날엔 제방이었고 가까운 옛날엔 밭두렁길이었다가 지금은 자전거길이 되었다. 알록달록한 자전거 무리들이 취수장 쪽으로 급히 도는 모퉁이에 물금나루터가 있다. 지금은 취수원 옆이라 나루터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그 예전엔 부산과 밀양 등지에서 오는 상인들이 드나드는 길목으로 물금장터와 이어진 왁자한 곳이었다. 요산 김정한(1908~1996)의 소설 <수라도> 속 '가야부인'의 고단한 삶은 이 물금나루에서 황산베랑길을 따라 비롯한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용화사를 들렀다가 화제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토교까지 걷는다. 이 길이 일제강점기 여성에게는 수라도를 향해 난 길이었거나 아수라의 길(道)이었으리란 생각을 해 본다.

▲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 속 '가야부인'의 고단한 삶은 이 물금나루에서 황산베랑길을 따라 비롯한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용화사를 들렀다가 화제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토교까지 걷는다. /이헌수 시민기자
▲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 속 '가야부인'의 고단한 삶은 이 물금나루에서 황산베랑길을 따라 비롯한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용화사를 들렀다가 화제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토교까지 걷는다. /이헌수 시민기자

◇시집으로 가는 길, 물금나루터에서 황산베랑길

소설 <수라도> 속 주인공인 가야부인의 친정은 '김해 고을' 끝 '명호'라고 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부산 명지이다. 낙동강이 칠백 리를 품고 온 모래가 명지 앞바다에 쌓였다. 바다 바닥이 모래여서 바닷물엔 찌꺼기가 없었다. 게다가 땔감으로 쓸 을숙도의 갈대는 지천이었다. 명지는 고래(古來)로부터 갈대를 땔감 삼아 끓여 만드는 자염(煮鹽)의 생산지였다. 대동여지도에도 자염최성(煮鹽最盛)이라고 적고 있다.

"신도란 섬에 가면 우리 염전이 제일 컸지!"

명호에서 소금밭 규모가 가장 컸다는 신도에서도 가장 큰 소금밭을 가진 집안의 딸인 가야부인이 양산 화제로 시집온다. 혼례를 치르고 1년여 만에 시집으로 오는 길이다.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길길이 자란 갈밭 속을 십 리도 더 빠져나와야 되는데……하필 시위가 내린 위에 바람까지 어떻게 사나웠던지.

시집을 가는 길이 편치 않은 까닭이 어찌 날씨 탓이기만 했겠는가. 딸과 며느리의 삶은 천양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라의 운명이 풍전(風前)이었던 시절이었다. 가야부인의 시댁은 일왕(日王)이 한일병합에 협조한 대가로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만주로 떠난 시할아버지의 집안이니 물이 넘치고 바람이 부는 뱃길은 이야기의 복선이다.

"제우(겨우) 황산 앞벌에 배가 밀쳐 닿자, 인자는 살았다 싶으더구만!"

초행에서 신행까지 1년이 훌쩍 넘겨 시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배웅 나온 친정 사람들과 맞이하러 온 시가의 사람들로 물금나루터는 북적였다. 가야부인을 비롯한 양가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황산베랑길을 지나고 토교에서 화제로 꺾어 들어 명언 마을에 이르렀을 것이다.

가야부인이 딸에서 며느리가 되는 과정은 농사와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민중의 아낙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몸종까지 거느리고 왔지만 시집의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녀가 시집온 지 칠 년째 되던 해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던 시할아버지가 유골이 되어 돌아온다. 다음해 3·1운동에 가담한 시숙 밀양 양반이 왜놈들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다. 자식을 잃은 시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눕는다. 시아버지 오봉 선생은 시절을 한탄하며 바깥으로만 돈다. 가계를 떠안은 건 며느리 가야부인이었다. 시집온 이십 년 세월은 '그녀의 이마에 세 개의 긴 주름을 파놓고' '살결은 누르퉁퉁하게 탄력을 잃게 되고, 귀밑에는 서릿발이 희끗희끗'하게 했다.

▲ 1970년대 물금나루터. /양산시
▲ 1970년대 물금나루터. /양산시

물금나루터에서 취수장과 경부철로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용화사로 간다. 용화사와 관련된 소설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김해 상동에서 물금 황산장까지 낙동강이 얼어붙어 걸어 건널 정도로 추운 날이 가야부인의 시할아버지 입젯날이었다. 가야부인은 황산장에서 제사상을 봐서 이고 지고 베랑길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너무 추워서 바람을 피해 들어선 자리에서 가야부인은 한쪽 귀퉁머리가 이지러진 돌부처를 발견한다. 유학자인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륵암'을 세워 돌부처를 모신다.

소설 속 미륵암이 용화사라고 하니 안 들를 수가 없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근대라고 하지만 사회의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다. 유교의 충효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는 가부장적 억압이었고, 국가적으로는 쇼비니즘의 광기였다. 그런 속에서 유학과 대립하는 모양새의 불교는 여성들에게는 안전장치로 보였고, 그 안에 깃들어 서로를 위안 삼았다.

처음으로 집안이 알게 절구경을 나서는 시어머니의 눈에는 이슬 같은 것이 맺혀 있었다. 마치 그것이 오래도록 그녀의 넋을 억누르고 있었던 두터운 안개가 가시어지는 듯한 해방감의 표시인 듯이.

손자녀를, 자식을, 남편을, 딸을 그렇게 빼앗긴 할머니, 어머니, 아내들은 태고 나루에서 눈물을 짓다 가까운 미륵당을 찾기가 일쑤였다. "명천 하느님요!" 하고 땅을 치던 그들은 말 없는 미륵불 앞에 엎드리어 떠난 아들 딸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었다.(…) 무슨 기도를 드려 소원성취를 한다기보다 아들, 딸, 남편, 손자녀들을 억울하게 빼앗긴 그녀들은 거기서 어떤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하였던 것이다

가야부인에게 미륵당은 괴질로 죽어 솔밭에 매어둬야 했던 딸을 위무하는 공간이었고, 아낙네들에게는 개인적·민족적 고통을 서로 덜어지며 마음을 기대었던 민중적 정취의 공간이었다.

◇토교에서 만나는 인권운동가 고 김복동 할머니

토교는 <수라도>에서는 태교, 태교나루터로 나온다. 명지에서 소금배가 토교에 닿았다고 하면 가야부인이 친정 소식을 들으러 맨발로 달려갔다는 소설 속 장소이다. 화제 들녘을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드는 화제천(소설 속 '냉거랑')을 건너는 흙다리가 있던 동네여서 토교라 부른다.

토교는 소설에서, 가야부인이 시집으로 드는 길목이었고, 옥이에게는 정신대로 징발될 뻔한 장소이다. 옥이는 가야부인의 몸종으로 친정에서 데려온 아이지만 딸을 잃은 가야부인에게는 딸이나 한가지였다. 그런 옥이에게 정신대 징집 '붉은 딱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옥이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바삐 담뱃진을 긁어내어 환약처럼 만들었다. 넘기기 좋을 만한 게 열 개도 더 되었다. …

지난 5월 13일에 1439차 수요집회가 있었다. 세계 최장 집회로 기록되고 있다. 최장 집회라는 건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최장의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의 간절함과 최장의 집회에도 변함없는 악랄함이 이보다 극명할 수 있을까 싶다. 후대에 세계 최장 집회의 시발이 되는 역사의 장면을 <수라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히노마루'가 높다랗게 강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동사 앞뜰에는 옥이 말고도 여섯 명의 처녀가 나와 있었다. 배를 타야 할 태고나루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오봉산 밑 열두 부락의 해당자들이 모두 거기에 모였던 것이다. 그들 도합 일곱 명을 위한 전송꾼과 구경꾼이 줄잡아도 사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그 열두 부락의 대표이기나 한 듯이 이와모도 구장이 시종 앞장을 서서 서둘렀다. 숫제 학교 선생님처럼, 고작 일곱 사람을 앞에 두고, 줄을 지어 서라느니, 면서기가 나누어 준 '히노마루'가 박힌 수건을 어서 이마에 동이라느니, 혼자서 야단을 빼듯했다. 그것을 지극히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긴 칼을 허리에 찬 순사부장이 드디어 출발에 즈음한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우리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여러분만의 명예가 아니라, 한편 이 지방의 자랑입니다…"

그러고는 이와모도 구장을 선두로, 일곱 처녀와 그녀들의 가족, 거기에 모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가를 향해 나아갔다.

이때였다. 박 서방이 쏜살같이 달려와 옥이의 팔을 잡아챈다. 옥이를 처로 올린 호적을 내밀며 외친다.

"그 손 띠이라(떼라), 내 처다!"

소설 <수라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박 서방의 처가 된 옥이는 정신대 징집을 모면한다. 하지만 박 서방이 구출한 옥이는 일곱 명 중의 한 명이었을 뿐이다. 소설 속에서도 구출되지 못하고 정신대로 끌려간 여섯 명의 처녀가 더 있었다. 소설 속 옥이와 결코 다르지 않은 심정으로, 담뱃진을 삼켰을지도 모를 그 여섯 명이 토교에서 배에 실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전쟁터 어디론가 끌려갔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눈물을 훔치면서도 몰랐다. 정신대,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의 여러 이름의 비극을 들으면서도 몰랐다. 전국에서 정신대를 징집해 갔을 터인데 내가 사는 양산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란 데에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다. 몇 해 전 학생들과 부산 수영에 있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에 갔더랬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 분이 양산에 생존해 계시다고 듣고서야 이 아픈 역사가 이 도시의 아픔이기도 함을 알았다. 그리고 2019년 1월에 또다시 그 아픈 역사를 들었다.

'암 투병 중이던 김 할머니는 28일 밤 10시 41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에서 숨을 거뒀다. 경남 양산 출신인 김 할머니는 14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22살에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나라 안팎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해온 평화운동가였다.(한겨레신문, 2019. 1.19.)'

신문 기사를 보고서 <수라도>가 생각났다. 토교에서 끌려가야만 했던 여섯 명의 옥이를 생각했다. 고 김복동 할머니가 토교에서 끌려간 여섯 명의 옥이였다.

여성 연대기를 몇 개의 단어로 말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부터 역사의 질곡마다 칼바람은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가장 약한 자리가 항상 여성의 자리였다. 수라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의 하나로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물금나루터와 토교에서 가야부인의 삶을 읽으며,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곳곳이 수라도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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