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 작가의 삶 이야기…짧고 단단한 문장 인상적
불편할 뿐 불가능은 없고…걷고 문 여는 일 모두 기적
평범함 속 빛나는 한순간…불온전한 온전함 사랑해

책을 읽으며 문득 주변 물건들을 가만히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미처 의식할 새 없이 쓰는 일상 사물들 말이다. 고장이 나거나 부서지기라도 해야 겨우 '어? 왜 이러지?' 하며 새삼 주목을 받는다. 산문집 <애틋한 사물들>(남해의 봄날, 2020년 3월)에서 정영민(34·부산시) 작가는 지금, 여기 자신 앞에 놓인 이런 물건에 집중한다.

"저는 뇌병변 장애인이지만 일상에서 제가 가진 장애를 크게 의식하지 못합니다. 느리긴 해도 제 두 발로 걸어서 어디든 가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이따금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해요. 그래서 전 제 불편한 몸이나 삶에 불만이 없어요. 어제보다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더 행복하다고 믿어요. 그러니 몸이 불편하고 말이 어눌한 것은 제겐 큰 문제가 아니에요. 아마 저를 아는 이들은 여기에 모두 동의할 거예요. 그들에게 저는 일상이 조금 느린 사람일 뿐이거든요."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 〈애틋한 사물들〉 정영민 지음
                               ▲ 〈애틋한 사물들〉 정영민 지음

하지만, 그가 지금처럼 사물 하나하나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실패를 반복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평평한 길만 걸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잘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계단은 어떤 특별함 없이 나를 걷게 했다. 아니 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첫 계단을 오를 땐 발을 높이 들어 올리는 일조차 힘겨웠으나 거듭할수록 다리 힘도 오르고 계단을 오르는 일이 점차 수월해졌다." ('계단' 18쪽)

끊임없는 반복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 낸다. 어릴 적 몸 상태를 봤을 때 지금처럼 걷고,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고 닫는 일 모두가 작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한다.

"기적은 반복과 동의어다. 기적은 그 간 내가 조금씩 해 왔던 일들이 쌓여서 만든 결과물이다. 무수한 반복의 결과라고 말해도 좋다." ('단추' 25쪽)

"운동장을 돌다 보면 잊혀진다. 단순히 도는 것이 전부다. 돌며 어떤 반복과 견딤을 배운다. 삶은 견딤과 반복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매번 사람들은 새로운 걸 꿈꾸고 도전하며 열정을 불태운다지만, 모든 도전을 낱낱이 쪼개 보면 남은 말은 견딤과 반복, 그리고 지루함이다. 그 단어들을 빼놓고 이루어 낼 수 있는 삶은 없다." ('운동장' 42쪽)

하여, 책은 반복과 기적 사이에 놓인 무수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간 속에서 곰곰이 단련한 삶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이 책이 주는 진짜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그냥 삶이다. 그 삶이 좀 더 좋아질 수 있도록 조금의 노력을 보태는 것이 재활이나 기타 치료이지, 그 삶을 부정하거나 뒤바꾸려 시간을 투자하진 않는다." ('녹음테이프' 81쪽)

"세상에 진짜 안 되는 건 없고 불가능도 없다. 다만, 조금 어렵고 불편할 뿐이다. 나만의 방식을 찾으면 불편마저도 잊는다. 난 그게 삶의 방식이라 믿는다. 모두가 자로 잰 듯 칼질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비약일지도 모르나 내 생각에 사람은 희망이 아니라 '뭔가 하고 싶음'으로 산다." ('식칼' 73쪽)

▲ 통영 봄날의 책방을 찾은 정영민 작가.  /남해의 봄날
▲ 통영 봄날의 책방을 찾은 정영민 작가. /남해의 봄날

책에 담긴 건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아이들이 크면서 사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익숙해지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만 흠이 있다면 내가 처음 접은 비행기나 배는 모두 조금 엉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비행기였고 배였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아이들의 첫 종이접기는 엉성하지 않았을까? 그 엉성함을 창작이라 믿으며 접고 또 접으며 정교함과 섬세함을 익혀 반듯한 배나 비행기를 만들지 않을까?" ('색종이' 99~100쪽)

원래 시를 배우던 작가라고 들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스타카토처럼 짧게 이어지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생각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탁하고 뱉어내는 듯한 몇몇 첫 문장들이 그렇다.

"반복은 무시할 수 없다." (아령), "지독하다."(연필), "거의 모든 세상이다."(문), "사적이며 내밀한 사물이다."(가방)

작가는 책에서 좋은 문장을 쓰려면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흐름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하려고 작가가 생략한 고달픔, 슬픔, 행복, 기쁨이 책에 담긴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뭐, 상관없다. 지금도 작가는 매일 매일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보통의 평범한 일상이 날마다 이어진다. 지루함이 이어지다 어느 한순간 반짝이다, 다시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단추' 24쪽)

매일매일 이어지는 평범한 일상은 생각보다 힘이 세서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사태로 끊어졌던 일상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이 익숙함의 힘으로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내자.

"오늘도 나의 불온전한 온전함을 사랑하기로 하자." ('손톱깎이' 55쪽)

200쪽.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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