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영산 망우정 짓고 여생 보내
나랏일 근심 잊고자 가난 속 산수 즐겨

곽재우 하면 사람들은 홍의장군을 먼저 떠올린다. 의령 들머리에는 붉은 옷을 입은 곽재우 장군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경남을 지키고 낙동강을 지킨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기강전투, 정암진대첩, 화왕산성 수성 정도는 알려져 있다. 또 보태자면 당쟁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키려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장군의 살아생전 일상이나 그 속에 담긴 인간적인 면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나라를 구한 의병장 곽재우, 그 숨은 이야기'는 10월까지 20회에 걸쳐 매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계획이다. 살벌한 전투 상황이나 건조한 공직 생활도 다루겠지만,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냄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함께 누리자고 지은 망우정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말년을 망우정에서 보냈다. 후손들이 장군의 시문 등을 모아 1771년 펴낸 <망우선생문집>을 보면 1602년 전라도 영암 유배에서 풀려나자 현풍(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비슬산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망우정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암에 강사를 지었는데 영산현 남쪽에 있다. 선생이 산수의 명승을 사랑하여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우라는 편액을 달고 만년에 거처할 자리로 삼았다." 영산은 창녕군 영산면 일대인데 망우정은 지금 주소로 도천면 우강리이다.

<문집>에는 '처음 창암강사를 얽고(初構滄巖江舍)'라는 한시가 있다. 망우정의 당시 모습과 곽재우 장군의 심정이 그려져 있다. 낙동강 가 벼랑 위 가파른 곳에 자리 잡은 망우정에 울타리를 치지 않고 풍경을 혼자 독차지하지 않겠노라 적었다. '땅 파고 바위 쪼니 계단 절로 이뤄지네(斥土治巖階自成)/ 층층이 가파른 길 위태롭게 기울었네(層層如削路危傾)./ 여기에 울타리 없다 말하지 말게(莫道此間無外護)/ 장삼이사 누구나 밝은 달을 보아야지(李三蘇百翫空明).'

▲ 망우정 뒤편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정면으로 낙동강 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오른쪽 비각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가 들어 있다.
▲ 망우정 뒤편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정면으로 낙동강 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오른쪽 비각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가 들어 있다.

◇망우당의 마지막 보금자리

곽재우는 이후 망우정을 떠나지 않았다. 1617년 4월 10일 66세로 세상 떠날 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머물렀다. '강가 정자에서 우연히 읊다(江舍偶吟)'를 보면 장군에게 망우정은 세상 생각을 끊고 스스로 즐기며 노니는 터전이었다. '아래는 장강이고 위에는 산인데(下有長江上有山)/ 망우정 한 칸이 그 사이에 있구나(忘憂一舍在其間)./ 근심 잊은 신선이 근심 잊고 누웠으니(忘憂仙子忘憂臥)/ 밝은 달 맑은 바람 상대하여 한가롭고 한가롭네(明月淸風相對閒).'

조정의 부름은 빗발치듯 쏟아졌다. 선조와 광해군이 숱하게 불렀지만 1604년과 1605년 봄(찰리사), 1610년 가을(오위도총부 부총관) 세 차례만 잠깐 나갔다. 마지못해 나갔다가 불에 덴 듯이 금세 돌아왔다. 장군에게 벼슬살이는 고심참담함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강가 정자에 돌아오다(歸江亭)'에서는 고단한 벼슬살이를 벗어난 홀가분함이 꽃향기로 표현되었다. '속된 세상에 잘못 떨어져(誤落塵埃中)/ 흰 머리 삼천 발이나 드리었네(三千垂白髮)./ 가을바람에 들국화 향기로운데(秋風野菊香)/ 말을 달려 달 아래 강가로 돌아왔다네(策馬歸江月).'

◇탈 말도 입을 옷도 없이

그렇지만 조정 벼슬아치들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다. 자발적 가난이 그들에게는 쓸쓸하고 초라할 뿐이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608년 9월 14일자에 임금에게 승정원이 출장복명을 하는 장면이 있다. 경상좌도병마사 임명 교지를 갖고 갔던 금군을 대신해 아뢰는 내용이다.

"현풍 본가에 물었더니 영산 산골에 있다 했습니다. 인적이 끊어진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쓸쓸하였습니다. 재우가 병들어 누워 나오지 못하기에 아들에게 전지를 받들어 들이게 했더니, '종이가 없어 글은 올리지 못하고 교지만 받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올라가려는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탈 말과 딸린 도구가 없고 단벌옷은 다 해져서 날씨가 추울 때는 길에 오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였다 합니다."

당시 닥나무로 만든 종이는 귀중품이었다. 두껍고 흴수록 더욱 그랬다. 부자들도 땅문서나 금은보화, 엽전꾸러미와 함께 따로 보관해 두고 쓸 정도였다. 망우정에 종이가 없었다는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유재란에서 같이 활동했던 배대유는 조정에 올리는 전기에서 장군의 소유물은 붓과 책상과 약절구, 거문고 하나에 고깃배 하나가 전부라고 적었다.

▲ 슈퍼스타들의 뱃놀이에서 창암정(망우정)을 다룬 그림 용화산하동범지도. 마주보이는 산 한가운데 중턱에 창암정 집 모양이 글자 아래에 흐릿하게 보인다. /용화산하동범지도
▲ 슈퍼스타들의 뱃놀이에서 창암정(망우정)을 다룬 그림 용화산하동범지도. 마주보이는 산 한가운데 중턱에 창암정 집 모양이 글자 아래에 흐릿하게 보인다. /용화산하동범지도

◇슈퍼스타들의 낙동강 뱃놀이

그렇다고 생활까지 쓸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곽재우는 이미 슈퍼스타였다. <망우선생문집> '연보' 1610년 8월에 보면 "서울에 있을 때 조정 벼슬아치들이 모두 다투어 오는 바람에 늘 자리가 비좁았으며 길거리 아이와 가게 심부름꾼들까지 모두 달려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려고 했다."

나라를 구한 임진왜란 영웅에 대한 당연한 관심이었다. 더구나 곽재우는 전란 이후 한 달 보름 만인 1592년 6월 1일에 이미 '경상우도에 널리 알려져 철없는 어린아이와 심부름꾼들도 모두 곽 장군이라 일컫고 있었다'(<선조수정실록>). 그래서 1691년 권유가 쓴 신도비명에는 '강정에 거처할 때도 영남의 제현들이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모두 공을 따라 놀기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1607년 1월 27~28일 벌어졌다. 한강 정구가 찾아와 망우정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한강 정구는 1580년대 창녕·함안에서 수령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에서 왜적과 싸웠다. 전란 중에는 "곽재우는 진주목사만 하고 말 인재가 아닙니다"(<선조실록> 1595년 1월 22일)라고 선조에게 아뢰기도 했다.

뱃놀이는 대단했다. 상주·함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함안군수 박충후와 정구의 제자면서 이미 뛰어난 학문을 이룬 장현광이 먼저 올랐다. 방명록인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을 보면 이 밖에 함안·영산·창녕·현풍·고령·성산에서 31명이 더 왔는데 배가 좁아 다 탈 수 없었다. 함안 의병장 조방이 형 조식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했고 영산 의병장 신초가 술잔을 돌렸다(조임도, '용화산하동범록후서'). 의병장 출신으로는 이숙·노극홍·신방집·이도자·박진영·이명념이 더 있었고 장군의 맏사위 신응(의병장 출신)과 장남 곽형도 자리했다. 술상을 앞에 놓고 곽재우는 스승 정구보다 제자 장현광이 낫다고 농담을 했으며 정구는 흔쾌하게 그 말이 옳다고 바로 맞장구치기도 했다(조임도, '취정록').

▲ 망우정. 왼편에 어진 이에게 준다는 여현정 현판이 걸려 있다.
▲ 망우정. 왼편에 어진 이에게 준다는 여현정 현판이 걸려 있다.

◇망우정이 여현정이 된 사연

이렇듯 장군이 마음을 모아 짓고 자발적 가난을 실행하면서 아꼈던 망우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보통 같으면 직계 후손에게 물려주었겠지만 곽재우는 아들이 다섯인데도 어진 사람을 골라 타성바지에게 넘겨주었다. 망우정 옆에 여현정 현판이 하나 더 걸린 까닭이다. 정자를 사유물로 여겼다면 못했겠지만 공유 자산으로 여겼기에 가능했다. 처음 정자를 지을 때 누구나 와서 밝은 달을 볼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않은 것과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처사였다.

세상 떠날 때 외손녀사위 되는 이도순에게 주었는데 이때 쓴 글이 <문집>에 있다. "강가 정자가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가 드문데 어진 사람에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정자를 사사롭게 여기지 않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산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마음을 그대 마음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고 어진 사람을 골라 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오는 어진 사람도 그대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 정자를 지킬 수 있는 어진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뱃놀이에 동참했던 조임도는 이도순의 친구였다. 정자의 새 주인에게 이름을 근심을 잊다(忘憂)에서 어진 이에게 주다(與賢)로 바꾸라고 제안했다. 어떻게 스스로 어질다고 하냐고 손사래치니까 그런 자질구레한 데 매이지 말고 실질에 힘쓰라고 일러주었다. 실질이 무엇이냐 묻자 장군의 낚시터와 고깃배, 거문고와 술항아리, 붓과 책상, 약화로와 차솥을 황량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라 답했다. 그대로 쓰면서 즐겨야지 장군이 갔어도 유적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덧붙였다.(여현정기) 물론 지금까지 400년 남짓 세월이 흐르면서 이 모두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띠집도 기와집으로 바뀌었지만 정자 자체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망우정은 어쩌면 곽재우 장군의 유적이라는 사실이 잊혔으면 그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곽재우 장군은 그토록 잊고자 했던 근심을 과연 잊었을까? 당연히 잊을 수 없었다. 왜적은 바다 건너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국면이었고 북쪽 오랑캐는 장차 청나라로 세력을 키워 밀고 내려올 기미를 진작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정은 갈수록 격화되는 당쟁으로 갈피도 잡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를 쓴 사신조차 1617년 6월 4일 자에 "삿갓과 도롱이를 걸치고도 세상일은 즐겨 잊었으나 말이 나랏일에 미치면 늘 마음으로 잊지 못하였다"고 적었던 것이다. 곽재우에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근심이었으며, 잊을 수 없으니까 더욱 잊고 싶어했던 근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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