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백수 된 영화 PD
이웃 통해 삶의 의미 깨달아
주인공 성장 과정 묵묵히 그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맞이한다. 손 쓸 수 없는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면 무력감을 느끼고 고개를 떨어뜨리지만, 다시 한 번 전열을 가다듬고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여기, 일생일대 위기를 맞은 한 사람이 있다. 이름도 찬란한 '찬실'이다.

코로나19로 개봉 예정작들이 줄줄이 개봉일을 미룬 지난달. 용감하게 개봉한 독립영화가 있다.

3월 5일 관객과 만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는 뜻밖의 선전을 했다. 개봉 5일 만에 관객 1만 명, 3주 차에는 2만 명을 돌파하며 3월 독립·예술영화 순위 4위로 한국영화 최고 성적을 거뒀다.

이력도 화려하다. 영화는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아트하우스상, KBS독립영화상)을 차지했고,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이게 다 찬실이가 복이 많은 덕일 테다.

▲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찬실이 까칠한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분)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있다. /스틸컷
▲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찬실이 까칠한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분)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있다. /스틸컷

◇영화같이 찾아온 위기 = 결혼은 못 해도 좋아하는 일은 실컷 하고 살 줄 알았다는 찬실(강말금 분). 영화는 찬실의 굳건한 믿음이 깨지면서 시작한다.

찬실은 올해 마흔이다. 남편도 자식도 집도 돈도 없는 그에게 유일한 빛은 영화다. 영화 PD로 일하며, 일만이 자신을 충만히 만들어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정이 딱해졌다. 새 영화 촬영 무사고를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던 날. 감독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감독이다. 찬실 아버지는 뒤늦게 '잠이 많이 왔다'고 고백했지만 그의 영화는 찬실의 모든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찬실은 시내가 훤히 보이는 달동네로 이사를 한다. 설상가상 찬실에게 '한국 영화의 보배'라고 치켜세우던 제작사 대표는 안면을 바꿔 "네가 한 게 뭐가 있냐"라며 더는 함께 일할 수 없음을 알린다.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이 주인공에게 어떤 복이 쏟아지려고 영화 제목이 '찬실이는 복도 많다'인 걸까.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 영화 초반 '무슨 복이 많다는 거야'라는 의문은 극이 진행되면서 차차 해소된다.

찬실은 자기 삶에서 영화가 빠져나가자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그 옆을 지켜준 건 매력적인 캐릭터의 주변 인물들이다.

먼저 배우 소피(윤승아 분)가 있다. 소피는 매사에 고민이 많은 찬실과는 달리 '발연기'라는 지적에 속상해하다가도 금세 잊어버리는 '잘 살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졌다. 일자리가 절실한 찬실에게 가사도우미 일자리를 제공하고, 찬실이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고 지지해주는 의리파다.

까칠한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분)와는 한글을 가르쳐주며 가까워졌다. 할머니가 운동하며, 밥 먹으며, 콩나물을 다듬으며 툭툭 던지는 말은 찬실에게 깨달음을 주기도,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압권은 장국영(김영민 분)이다. 영화 <아비정전>의 그 장국영이 입고 나온 흰 러닝셔츠에 속옷차림을 한 채 찬실 앞에 나타난 의문의 남자.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찬실의 고민을 들어준다. 그러고는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묻고,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 응원한다.

소피의 프랑스어 선생님이자 영화감독인 김영(배유람 분)은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나이 차이, 찬실보다 5살 연하다. 그는 찬실에게 촉촉한 설렘을 선물한다.

이 밖에 용달차도 오를 수 없는 달동네 집까지 짐을 옮겨준 스태프, 많이 마른 딸이 걱정돼 편지를 보낸 아버지 등 가까이 있어 알아채지 못한 존재들이 찬실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찬실에게 있는 복이란 세상이 뒤집히는 기적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소소한 '행복'이었던 게다.

▲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스틸컷
▲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스틸컷

◇버려야 채워지는 것들 = 경쾌하게 흐르는 영화는 특정한 사건보다는 찬실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찬실이 영화를 잃고 슬퍼하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과정을 묵묵히 비춘다.

주인공 찬실처럼 인생살이 계획한 대로, 바라는 대로만 가지 않는다. 코로나19 상황을 예측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대재앙 앞에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다. 누군가는 전부를 걸어 차린 가게를 정리해야 하고, 누군가는 수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더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테다.

이런 상황이 원망스럽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탓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우울을 털어내고 일상에 흩어져 있는 행복을 느끼며 다시 도약할 날을 꾀해보면 어떨까.

"수처작주하니 입처개진이라.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 주인공이 되니,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찬실이 소피의 방에서 발견한 책 문구다. 삶의 막다른 길 앞에 고개 숙인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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