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외면 않는 이가 착한 사람
눈치만 살핀 존재감 없는 정치인 경계를

태어나서 지금까지 듣지 못한 말이 몇 개 있다. 예쁘다, 참하다, 착하다와 같은 말들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는데, 나는 엄마한테조차 예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예쁜 김봉임, 참한 김봉임, 착한 김봉임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지난 43년, 그렇다고 슬픈 건 아니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속상하지 않고, 참하게 행동한 적이 없으니 그 또한 후회는 없다. 다만, 착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에는 약간의 미련과 억울함이 남아있다. 성격이 순하지 않다는 이유로 성품도 착하지 않을 거라는 오해를 종종 받아왔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똑같이 땡땡이를 쳐도 성격이 순한 친구들은 착해서 단순가담자로 분류되고, 왈가닥인 나는 땡땡이를 주도한 선동자로 찍힐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직원이 하필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괴팍한 나로서는 문제를 제기할 때 약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자칫하면 순한 어린 양을 괴롭히는 못된 늑대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못 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준 건 순둥이 직원인데, 오히려 내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모난 인간으로 분류되는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그럴 줄 몰랐어요. 순하고 착한 친구로 기억하는데…." TV에서 끔찍한 범죄자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순하다와 착하다는 다르다고. 범죄자의 성격이 순했을지는 몰라도 성품이 착하지는 않았을 터, 지인들은 조용하기에 착할 거라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내 주변에도 온순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착하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나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제 역할만 다하는 사람은 착한 것이 아니다. 내 기준에 착한 사람은 폭력과 억압, 불평등한 사회 모순에 반항하고 대들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혹시 모를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옳은 가치를 실현해 나갈 줄 아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바탕에는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고로, 나는 착함과 순함을 가르는 기준은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민감한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순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감을 수 있지만 착한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일을 내 일처럼 나서서 돕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 그들의 성격이 순하든 괴팍하든, 둥글둥글하든 모가 나든, 그들의 성품은 착한 것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 순한 정치인과 착한 정치인은 다르다. 순한 정치인은 갈등을 두려워하지만 착한 정치인은 갈등을 돌파하고자 한다. 순한 정치인은 조용히 시대의 흐름에 무임승차하고자 하지만 착한 정치인은 시대정신을 만들고자 한다. 반대여론을 무서워하지 않고 올바른 가치를 위해서라면 맨 앞줄에 서서 돌멩이를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 수도권 중심, 대기업 중심, 부자 중심, 정규직 중심, 기울어진 운동장 대한민국에서 착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대한민국은 순한 정치인보다 포기를 모르는 독한 정치인이 착한 정치를 펼칠 확률이 높다. 바야흐로 4월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에는 순한 정치인에게 현혹되지 마시라. 4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치인, 맨 뒷줄에서 이리저리 눈치만 살핀 존재감 없는 순한 정치인을 경계하시라. 누가 사회적 약자를 더 많이 배려하는가? 누가 나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가? 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가치를 실현할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착한 정치인을 선택하는 총선, 4월 15일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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