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바다 그림
일상적인 풍경과 사물에 보여준 애착

바다를 본다. 바다를 보며 상상한다. 바다 너머에 있을 세상을, 바다를 그린 그림을 통해 화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윤형근 화백의 바다 그림은 잊고 있던 바다를 상상하고, 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역설적인 공간인 바다의 구체적인 서사 공간을 확인하게 했다.

서사는 시간이고 공간이다. 324㎞의 해안선을 가진 창원의 바닷가에서 살아오면서 바다를 인식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마산과 진해의 해안선은 주로 공공이 점유하고 있었고, 도시의 미래가 해양에 있지만 정작 도시에서 해양과 해안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기에 마산과 진해의 바다를 대상으로 경탄음을 사용하고 있는 작품들이 반가웠다.

윤형근 화백의 바다 풍경은 하늘을 포함하여 뚜렷한 형체를 지워 몽롱했고, 물 입자는 손으로 만져질 듯 습한 기운을 머금었다. 오랜 시간 여명이 비치면서 수면에 일렁이는 빛, 여울이 보이는 풍경, 그곳에서 숱한 색이 서로 비벼가며 공존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욕망이 개입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시적인 여운과 문학적인 감수성이, 감각의 편린들이 상호 개입되고 간섭하면서 유기적인 연속성을 이루고 있었다.

작가에게 진정한 작업은 어쩜 최종이 아닌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윤형근 화백의 바다는 바다일까?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자라고 성장한 주변 바다를 보여주고 있다.

바다는 예술가들에게도 바다이다. 우리말 '바다'는 경탄음을 사용하여 바다 전체뿐 아니라 바다를 덮은 하늘까지도 총칭하는 말로서 크고 둥글고 넓게 울리는 소리이다. 윤형근 화백도 그래서 감성적 대상으로서 바다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보이는 사실의 재현이라면 거기에 작가로서의 세상에 대한 사유를 담기 어렵다. 반면에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사유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림은 어떠한 경우에도 환상이다. 설령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옮겨 놓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림에서 보고 있는 풍광은 모두가 평면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가공의 세계이기에 현실풍경을 사실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현실과는 완연히 다른 회화적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주관적인 감정에 의탁하고 있다. 그래서 바다는 바다가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시각에 익숙한 풍경이건만 거기에는 차가운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꿈과 환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감성을 표출하는 집단이 예술가라고 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표현은 본성을 찾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는데, 길은 삶을 향해 열려 있는 통로이며, 그것을 통해서 예술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이어간다.

윤형근 화백 삶의 궤적을 지켜보면 삶의 질곡에서 얻은 감성과 사물에 대한 교감은 늘 감성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림에서도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얻어진 순화된 정서와 일상적이며 평범한 풍경과 사물들에 대한 애착을 화지 위에 옮기고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순간순간 기록하여 이미지로 남기려고 했다.

전람회가 끝나고 그림에 사족을 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응원이기도 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